"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임재 안에 설 수 있을까? 내 편에서는 행복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로이 나를 받아 주시면서 … ."
이것은 죄인이 마음에 품고 있는 질문입니다. 죄인은 그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죄가 가로놓여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맨 처음 사람 아담은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그는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부분만 가리는 것으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습니다. 반드시 완전히 가리는 일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조차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으로 가리는 일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가까이 다가 오실수록, 자신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치마가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낙원의 울창한 숲으로 황급히 숨어 버렸습니다.
아담에게 진정한 '은신처'를 가르쳐 주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려워 떨고 있던 아담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가 숨어 있는 곳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아담에게 해결책이 될 것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치를 가리기에 더 나은 것, 그리고 더 나은 은신처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은혜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곧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의 편에 서셔서 죄인의 원수, 즉 옛 뱀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여인의 후손, 곧 진정한 '은신처'가 되는 '그 사람'(사 32:2)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아담은 안심하고 숲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계시된 은혜 안에서 아무런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롬 5:2). 그는 기쁜 소식을 들었고, 비록 그 소식은 짧은 것이었지만 그 소식을 통해 아담의 담대함은 회복되었고, 아담이 느끼던 공포는 제거되었습니다.
기쁜 소식을 들읍시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신 그 소식을 듣고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기쁜 소식을 들읍시다. 우리에게 믿으라고 계시된 이 기쁜 소식은 사람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로서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그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신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말씀들을 여기에 몇 구절 인용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심령이 이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구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런 말씀들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저 이 말씀을 연구하라는 우리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진술해 놓은 드넓은 말씀의 들판을 우리와 함께 거닐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의 진수를 참으로 알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가장 진실하고, 가장 단순하며, 가장 탁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말씀일 뿐만 아니라 영광과 축복에 대한 약속이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은혜', 또는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 또는 '긍휼'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를 들어 보도록 합시다.
말씀에서 평강의 확신을 얻으라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민 14:18).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삼하 24:14).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대하 30:9).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느 9:17).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대하 20:21).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 86:15).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시 57:10).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시 108:4).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9).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18). "내가 …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호 14: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딛 3:4). "우리를 구원하시되 …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 하셨나니"(딛 3:5).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자기 은혜의 말씀"(행 14:3).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
지금까지 인용한 말씀들은 도무지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값없는 사랑에 관해서 친히 하신 말씀 중 일부분입니다. 위에 인용한 말씀은 모두 신실하고 참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위의 말씀이 모두 신실하고 참되다고 인정한 적이 거의 없거나, 그 말씀들이 표현하고 있는 복된 소식에 주의를 기울인 적이 거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위의 모든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자들에게까지 평화를 말하기에 적합합니다. 이 모든 은혜의 말씀 하나하나는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둥글고 푸른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별과 같습니다. 또는 사막의 바위와 모래 한복판에서 신선한 물을 콸콸 솟구쳐 내는 샘과 같습니다. 이 즐거운 소리들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유복합니다(시 89:15).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인용한 모든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씀을 읽고 또 읽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씀일지라도 그 말씀을 읽고 또 읽는 것은 모든 면에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위에서 인용한 말씀들을 읽고 또 읽는 것이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중요한 이유는,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의 풍성함에 관한 이와 같은 선언 속에 싸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께서 우리에게 빛과 평강을 주실 때 바로 이런 말씀들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위에 인용한 말씀들은 성령께서 영혼에게 기쁨을 전해 주실 때 기쁨의 사절단으로 사용하기를 기뻐하시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들 속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한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한 차례 읽었는데도, 평강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면, 한 번 더 읽으십시오. 두 번을 읽었는데도, 평강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면, 한 번 더 읽으십시오. 백 번을 읽고 천 번을 읽어도 여전히 평강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면, 다시 한 번 더 그 말씀들을 연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도입니다(행 7:38).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영원히 있습니다(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고 반석을 산산조각 내는 방망이와 같습니다(렘 23:29).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우리 스스로를 천거하는 것은 바로 진리를 나타내는 것을 통해서입니다(고후 4:2).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기록된 말씀은 반드시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위하여 그 말씀을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기록해 놓으신 이런 구절들을 읽고 또 읽고 하는 것을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들은 마침내 여러분의 어두운 영혼에 천국의 기쁨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을 지필 것이며, 눈부신 빛을 비칠 것입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해질 무렵에 어떤 별을 그 별이 늘 있던 자리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기대와는 달리 처음에 여러분은 그 별을 다시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 별이 그 자리에 여전히 있고, 그 별빛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눈을 감아 버리거나, 다른 대상으로 시선을 돌리는 대신에, 그 별이 늘 떠 있는 자리라고 알고 있는 그 지점을 더욱더 골똘히 응시합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여러분이 보기를 원하던 그 별이 서서히, 그리고 어렴풋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끈기 있게 찾은 결과, 오랫동안 찾던 보화를 발견하는 열매를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에 관하여 말하는 위의 성경 구절들도 이와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구절들을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구절들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 안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듯이 그 구절들을 내팽개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아직 그 구절들을 제대로 본 적도 없습니다. 위에 인용한 각각의 말씀 안에는 값을 헤아릴 수도 없이 기이한 것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시 그 말씀들에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그 말씀들을 탐사하고 연구하십시오.
우리 불신앙과 무지를 탄식하는 성령
성령께서는 그 말씀들이 내포하고 있는 영광을 여러분에게 계시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간절히 그것을 원하십니다. 죄인에게 교사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성령의 직무요, 바로 그것이 성령의 즐거움입니다. 여러분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자 하는 성령의 뜨거운 열심은 배우고자 하는 여러분의 열심보다 못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 불신앙으로 성령을 근심케 하고 성령을 내쫓아 버리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에 고통을 주는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여러분 안에 존재하는 악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곧 자기 아들을 내어 줄 만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앙, 그리고 애정 어린 긍휼을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시고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시는 직무를 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이 중대한 진리를 결코 잊지 마십시오.
또한 다음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가르치실 때는 자기 자신의 말씀을 존귀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무관심하다고 의심하거나, 성령께서 여러분의 이해력의 눈에 빛을 비춰 주시기를 별로 원하시지 않는다고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참된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가르침뿐이라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는 동시에, 여러분을 위해 성경을 기록하신 일을 통해 확증된 성령의 사랑과 여러분으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하도록 만들려는 성령의 기꺼운 마음을 분리시킴으로써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말씀을 기록해 주신 분이 그 말씀을 해석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을 기록해 주신 분은 여러분이나 자기 자신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을 기록해 주신 분은 여러 가지 행위나 여러 번의 기도로 천상의 진리를 열어 달라고 설득하거나 매수할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기꺼이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고 보십시오.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지금 당장 이용하십시오.
회심자로서가 아닌 죄인의 자격으로 의지하라
다음과 같이 말하지 마십시오.
"회심하기 전에는 그분을 의지할 자격이 내게 없습니다."
여러분은 회심한 사람의 자격이 아니라 죄인의 자격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장래에 변화되어 있기를 소망하는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회심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와 자격인 것은 아닙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큰 죄는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그가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버리는 일에 대해서 정당한 근거와 자격을 요구하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비록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 사람은 크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도둑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내게는 도둑질을 그만둘 정당한 근거와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정직한 사람으로 내가 변화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정직한 사람으로 변화되면, 그 때 도둑질을 그만둘 것입니다."
회심할 때까지는 하나님을 신뢰할 자격이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불신을 버릴 만한 정당한 근거와 자격이 자기에게 전혀 없다고 말하는 불신자에게 제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회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일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즉시 그렇게 돌아설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의 불신앙은 전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성령에 대한 여러분의 불신앙이 여러분이 범한 가장 추악한 죄악들 중에 하나일진대, "회심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의지할 자격이 내게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까지는 하나님을 의지할 자격이 내게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행동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아니 적어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이 기록해 주신 말씀의 뜻을 여러분에게 기꺼이 보여 주고자 하실 만큼 은혜로우신 분으로서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실 만큼 은혜로운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 곧 자신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성령을 기꺼이 보내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것보다 여러분 자신이 훨씬 더 큰 열심을 가지고 배우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보다 여러분 자신이 훨씬 더 큰 열심을 가지고 복을 받으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다리는 분에게 가는 일을 자꾸만 미루는 죄인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빛을 비춰 주실 때까지 나는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빛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셨다면, 여러분의 말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 어디에서도 여러분에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만 한다는 여러분의 생각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신앙에 대한 핑계에 불과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말한 방법이 옳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라!"라는 말씀과 함께 "기다려라!"는 말씀을 동시에 하셨어야만 합니다. "오라. 그러나 지금 당장 오지는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순입니다.
어떤 친절한 부자가 가련한 절름발이에게 지금 즉시 자기에게 와서 필요한 것을 얻으라고 전갈을 보낸다고 합시다. 그 부자는 당연히 그 절름발이를 데려오기 위해서 자신이 타고 다니는 마차도 함께 보낼 것입니다. 그 부자는 결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라! 그런데 너는 절름발이고 더구나 타고 올 것이 없구나. 그러니 너는 최대한 힘을 쏟아 돈을 벌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나를 설득해 너를 위하여 마차를 보내도록 해야만 한다."
부자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대장과 마차는 함께 갈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친절한 부자도 이와 같이 한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은 함께 갑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리석게 주장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거나,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전혀 별개의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함께 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잘못은 전자를 보내신 분이 후자를 보내시는 데 인색하실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소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라고 부르는 간격을 만드는 장본인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고의적으로 거역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어떤 것을 대신 행하고자 하는 여러분의 결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어떤 것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로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구실을 대는 것입니다! 무능함을 이유로 내세움으로써 여러분 자신에게 돌아올 비난을 피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방식입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기꺼이 행해 주시고자 하는 바로 그 일을, 여러분은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행해 주시기를 즐거워하지 않으신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그의 아들을 영접하고, 즉각적으로 그의 복음을 믿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만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요구에 즉각 반응해야 하는 의무를 회피합니다.
여러분은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긴박한 필요성을 깊이 느끼면서도, 이런 핑계를 통해서 그런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양심을 달랩니다. 또 여러분은 믿기를 원하고 있고, 이 중차대한 일에서 여러분이 해야 할 몫을 지금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과 같이 불신앙의 죄를 범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으로 양심을 달랩니다.
믿으면 될 일을, 믿게 해 주십사고 하는 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것이니,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못 미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인 것처럼, 기도하는 것 역시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하지만 믿는 대신에 믿으려고 기도만 하면서 자신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도둑이 도둑질하는 것을 그만둘 생각을 가지고, 도둑질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지라도, 실제로 도둑질을 그만두지 않는 한, 도둑은 여전히 도둑입니다.
제가 지금 문제 삼고 있는 것은 기도가 과연 모든 사람의 의무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불신앙 가운데서 기도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고 열납하시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불신앙 가운데서 드려지는 기도는 미지의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고, 미지의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의무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믿으면서 기도하거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기를 별로 내켜하지 않으신다고 믿으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고 할 때,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서 그 두 가지 중의 한 가지 생각을 품고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여러분은 그 어떤 응답이나 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전자의 경우, 여러분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라고 기록된 것처럼 진실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지 않고 기도하는 의무를 지속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은 불신앙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여러분의 의무라고 결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현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기를 기꺼워하지 않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설복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기를 기꺼워하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그 말은 진심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적적인 방식으로 믿음이 여러분에게 뚝 떨어지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믿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실 때까지 불신앙 가운데 주저앉아 있다가 멸망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열납하실 만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능력을 여러분에게 주시도록 하나님을 설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열납하시지도 않을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아만 하겠습니까? 믿기 위하여 기도를 드린다고 말할 때, 여러분이 의도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망상이요 죄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기도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모든 사람에게 기도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으라고 말하고 싶은 것과 똑같이 기도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믿음을 내포하고 있고, 믿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고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그러나 나중에 사도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롬 10:14). 바로 이 말씀은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풀어 주는 열쇠가 아닙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욜 2:32, 행 2:21). 아니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불경건한 사람들이 범하는 중대한 죄입니다(시 14:4, 렘 10:25). 그런데 사도는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완성된 일을 아는 것이 화평과 평강
그러나 여기서는 이 점에 대해서 더 상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또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동안은 그 아들의 값없는 선물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에 관한 소식을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자신이 이것과 관련하여 여러분에게 이미 말씀하신 것을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자기 이름을 부르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아십시오. 왜냐하면 만일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위대한 선물을 알기만 해도,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하고자 할 것이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생명수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좋게 평가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또 우리가 죄사함을 받을 적합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가 행해야 하는 의무의 목록도 아니요,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감정의 목록도 아니며, 기도를 해서 우리 스스로 도달해야 하는 마음의 상태도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 위에서 행해진 위대한 일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 십자가에서 완성된 일을 아는 것이 즉각적인 화평이요 평강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책에서 제가 앞에서 인용한 기이한 말씀들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으십시오. 성경은 죽어 있는 책이 아니요, 살아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인간적인 책이 아니요, 신적인 책입니다. 성경은 불완전한 책이 아니요, 완전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고, 그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탐구하십시오.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잠 4:20, 4:13, 5:1, 7:1).
이런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마치 이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하나님은 무지한 사람들과 조롱하는 사람들과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잠 1:23). 무지한 사람들과 조롱하는 사람들과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케케묵은 핑계를 또 다시 들고 나오지 마십시오. 마치 이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위에 인용한 말씀 뒤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나님은 한순간이라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꺼운 마음, 곧 그의 말씀과 함께 성령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기꺼운 마음을 의심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존귀하게 여겨야 할 하나님과 그의 말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존귀하게 여기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기록하신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십시오. 그분이 그 말씀을 해석해 주시고 빛을 비춰 주실 것이라고 신뢰함으로써 그렇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죽어 있는 글자라고 불러서 그것을 조롱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죽어 있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죽음'이라는 비유를 사용하고 싶다면,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깨끗케 하든지 저주를 하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처럼, 성령의 말씀은 죽이든지 살리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다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존귀히 여기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삼상 2:30)라는 말씀은 성경을 기록해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사실인 것처럼, 성경에 대해서도 사실입니다. 평강, 빛, 위안, 생명, 구원,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감싸여져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 119:50).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 93).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살후 2:13).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신 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으로입니다(약 1:18).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력하고 전능하신 성령을 필요로 한다는 위대한 진리와 완전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