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경건 요약
Ⅰ. 서론
'칼빈의 경건'이라는 책자를 참조하여 요약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칼빈의 경건은 원래 로마카톨릭을 신봉하는 학생들에게 제네바의 종교개혁가이며 개혁주의
전통을 집성시킨 존 칼빈의 영적 교훈을 소개하려는 의도로 Battles가 쓴 'The Piety of
John Calvin'을 우리말로 편집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1986년 기독교 고전문서 편찬사업의 구성으로 1986년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에서 .칼빈의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
Ⅱ. 본론
기독교인의 삶에 대하여
이 장의 목적은 변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도교인의 삶을 바르게 이끌어주고 안내해줄 수
있는 어떤 질서를 보여주고자 하기 위함인 것이다. 성경은 그 자체의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
으며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철학자들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타당하고 확고한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의 동기들
<거룩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명령>
주님은 우리를 주님 자신과 연합하게 하시고 이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거룩'이라
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거룩하라고 명령하신다. 거룩해지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거룩함을 우리는 하나님이 부어주실 줄 믿고 하나님께만 매달려야 한다.
거룩히 구별된 하나님의 도성에는 더럽혀지거나 오염된 자는 들어올 수 없다. 흠없이 행하
며 정직한 삶을 영위하는 자가 주의 장막에 거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행위>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셨으며 또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양식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말해준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며 단순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
니라 그 삶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 관련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성부로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습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불손한 불
만을 표시하는 것이며 또다시 우리가 오물 속에 뒹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
광이 존귀하게 여김받도록 노력하며 보호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썩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의 면류관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함을 추구해야할 필요성>
나는 여기서 명목상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해있으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칭함 받고 싶
어하는 무리에 대해서 언급한다. 복음을 통해서 진리 안에서 그분을 아는 자 외에는 그 분
과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성한 이름을 자랑한다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이다.
복음은 혀로 외치는 교리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다. 우리마음 속의 가장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 그것을 유용하고 열매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에게 완전성을 추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완벽을 요구한다면 모든
사람이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한 완선
성이 아니라 완전성을 향한 방향이며 또한 정직함이다.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허식과
과장됨없이 열심을 다하고, 천천히 한걸음씩 선함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가 육신의 연약함으로부터 해방되는 그 날 그 완전한 선함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을 위한 규범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함>
하나님의 율법이 잘 정비되고 탁월한 방법으로 어떤 질서를 제공하지만 율법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이 거룩한 백성을 만들어나가는 데 더 적절한 것으로 하나님은 계획하신 것 같다.
신자의 의무는 다음과 같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고 받으실만한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대의 관습에 본받아 살면 안되며 자신의 이해를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찾고 알아야 한다. (롬 12:1-2)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우리의 생각과 일을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말고 육신의 편한 일을 추구하지 말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우리의 목표되신 주
님께 드리도록 하자.
'섬긴다' 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자율적 의미를 상실한 인간의 사고가 전적
으로 하나님의 영에게로 돌이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성이
인간을 통제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하여금 성령의 지도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함>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을 추구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영
광을 존귀하게 하는 일을 추구해야 한다. 성경은 자아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금하고 있
는데 마음 속에 들어있는 모든 탐심, 다스림에 대한 욕구를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야
심, 인위적인 영광의 추구 기타 죄악 - 자만 교만, 허례, 탐욕, 무절제, 사치, 쾌락-을 뿌리
뽑는 것을 말한다.
자아의 부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철면피와 같이 온갖 포악을 저지르게 된다. 자아
를 부인하는 마음이 없는 자들은 덕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다른 사람의 칭찬과 사랑
을 원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함과 이웃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이웃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을 우
리 자신보다 좋아하고 신실한 태도로 그들의 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라고 전하고 있
다. 우린 그렇게 할 수 없다. 다른 사람보다 우리 자신을 항상 높여야 하며 우리 안에 하나
님의 선물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면 그것들을 우리 자신들을 위해 높이고 그것을 찬
양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은폐하는 데 익숙하지만 이웃의 허물은, 지적해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침소봉대한다. 자기자신에게 아첨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성품과 도덕을 비난하는 것
을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 자기 뜻대로 될 때는 온건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온유함을 유지
하지 못하는 이 질병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
이것을 인식하자. 애석하게도, 우리 자신 안에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만한 요소가 전혀 없
으며 오히려 납작 엎드리게 만들만한 요소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새로운 명령이 주어져 있다. 허물을 바라보지 말고 간과
하며 혹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본성에 대해 엄격해지자. 성경은 주님의 손으로 주어진 모든 은사들은 모두가 교회
의 공동선을 위해 위탁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지체다. 어떤 지체도 자신만을 위해 이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이웃을 도와야 한다. 우리 자신의 권익에 대해 염려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이웃의 권익에 대해 염려하며 우리의 권익을 양보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명령받은 대상들 가운데 대다수는 별 볼일 없는 자들이다. 그
러나 그들의 장점만을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되며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주님이 그 허물을
스스로 짊어지셨기 때문이 아닌가?
성경은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하잘 것 없고 우러러 볼만한 것이 없는 그리
고 아무런 대가도 바랄 수 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조롱을 하지 않고는 은혜를 베풀 수 없는 유감스러운 감정을 소유한 사람이 있
다.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보아야 한다. 그 불운을 마치 자신이 느끼
고 겪는 것처럼 동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자는 자기가 베푸는 친절에 교만한 태도를 곁들이거나 그들이 궁핍한 처지를 견책하거
나 그들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하려고 노력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과 하나님>
우리는 타인에게 영예와 인정을 얻고자 애쓰며 권력과 부를 갈구하는 반면 가난하게 되는
것, 수욕당하는 것을 증오하며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다른 방법
으로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소원하거나 상상해서는 안된다. 단지 하나님의 축복에 의지해야
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술과 노력으로 아주 작은 진보조
차 이룰 수 없음을 기억하자.
모든 번영의 수단들은 오직 하나님의 축복에만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없는 한 우리에
게 다만 불행과 재난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때 하나님은 그의 선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며, 우리는 부를 긁어모으거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
예를 탈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우리를 순결함으로 떠나지 않게 하는
선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소망대로 일이 되어가지 않을 때, 끊임없는 재난, 질병, 전쟁, 상해, 우박이 농
작물을 못쓰게 만들며, 사랑하는 아내 자식, 친척들을 잃을 때, 혹은 거주하는 집이 불타버
릴 때가 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저주하게 되고 태어난 날을 증오하며
하나님을 욕하고 불공평하다고 잔인하다고 투덜거린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사건들을 만날 때에도 신앙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앙망
해야 한다. 아직도 하나님의 은총이 자기 집에 머물러 있으므로 그는 결단코 황폐함 속에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라도 모든 일이 주님의 허락하심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일을 조용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거룩한 법칙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바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행동하는 일이 없이
정연한 정의를 통해 선과 악을 공평하게 분배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십자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자를 자기의 소유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삶을 영위해나갈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삶의 방법은 이미 그리스
도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고통
받으셨을 분만 아니라 그의 생애가 사실상 일종의 끝없이 계속되는 십자가였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심연을 통과하여 영광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도 다양한 환난을 거쳐 그곳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그의 고난에 동참함을 느낄 때 그의 부활의 권능도 동시에 붙잡는다고 사도
바울은 가르친다.(빌 3:10)
우리의 고난과 불행이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귐은 더욱 확고해진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공허하고 어리석은 육
신에 대한 확신으로 마음이 부풀어오르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거
만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모욕, 궁핍, 사별, 기타 많은 재난을 통해 이런
것들을 감당할 만한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에 굴복할 때 우리는 마음이 겸
허해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굳게 서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은 하지만 어쩌면 그
것이 자기의 능력과 성실성을 의지한 것이고 자존적인 신념과 성실성으로 마음이 한 것 부
풀어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환란이 닥치면 당장 이 감정이 위선에 지나지 않음을 절감하
게 된다.
우리가 우리를 얽매고 있는 자기 사랑에서 해방되고 자신의 연약성을 깨닫는 것은 우리에게
적잖은 유익을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불신해야 하며 그때만이 하나님을 신뢰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총안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고난은 인내와 순종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신자의 내면 깊숙이 잠자고 있는 인내라는 은사를 보여주시기를 기
뻐하신다. 여기서 고난이 의미를 갖게된다. 왜냐하면 고난이 없는 인내란 있을 수 없기 때문
이다. 주님은 이같은 방법으로 인내를 가르치시며 자기들이 원하는 삶이 아닌 주님이 원하
는 삶을 살도록 이끄신다.
주님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주님께 순종케 하심으로 우리를 주님 곁에 가까이 두시
려고 하신다. 우리는 가끔 실패한 순간에도 주님의 멍에를 거부하려고 발버둥치고 있기 때
문이다.
우리가 지나치게 풍부한 선함으로 인하여 교만해지지 않도록, 지나친 멍에를 얻은 뒤 허영
으로 부풀어오르지 않도록,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자랑이 우리를 무례한 인간으로 만
들지 않기 위해서 주님은 고난이라는 약으로 우리를 제지하고 길들이시며 우리가 얼마나 어
리석은지 보여주신다.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은 세상과 함께 죄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32)
우리는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성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인자하심을 깨달아야 하며 결
코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증진시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심은 우리를 파멸과 정죄 안으로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저주 속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끝
없는 훈련을 받지 않으면 합법적인 자녀가 아니라 사생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불신자는 노예들처럼 매를 맞을 때 그 본성은 더욱 왜곡되어지고 악화되며 완고해지는 것이
다.
<고난은 명예로운 일이다>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은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받는 고난과 아울러 모든 의로운 대의를 위
해 고난받는 것을 뜻한다. 사탄의 거짓말로부터 하나님의 진리를 보호하고 악한 자로부터
무죄한 자를 보호할 때, 우리는 세상의 미움과 분노, 우리의 명예, 소유, 생명까지 박탈당할
위험을 받는다. 우리가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악인들의 교활함으로 고난받는다면 그것은 하
나님 나라의 상급을 쌓는 것이다. 오욕과 수치를 당할 때 더욱 하나님 나라에서 기뻐하자.
만약에 죽임을 당한다면 복된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일들을 부끄러워한다면 우리의 가치관 가운데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세상의 쾌
락을 주님을 높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보여주는 꼴이 되고 만다. 이런 십자가
는 우리에게 적합한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이 '그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것' 이기 때문
이다.(빌 3장)
<기독교인들은 고통과 슬픔을 표현한다.>
고통 당할 때 쾌활한 것은 인내하며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인내하는 가
운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든 감정을 빼앗긴 채 철저히 무감각한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하
지 않는다. 성도들이 격렬하고 쓰라린 궁핍과 질병 모욕과 죽음으로 고난당하지 않는다면
강인하고 절제하는 성품은 어디에서 단련할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도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의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우셨으며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셨다.(요 16:20) 주님은 두려워하셨고 자신의 영혼이 죽기까지 슬퍼하셨다. 이런 것
들을 열거하는 이유는 슬픈 감정으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더라도 인내를 추구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게끔 하려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의 오래참음을 찬양한다. 그들은 격심한 불행에 의해 타격을 받아도 깨어지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고통에 의한 공격을 받아도 영적 기쁨을 누린다. 고통 때문에 압박을 받아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로 기뻐한다.
<기독교인들은 순종과 인내를 잃지 말아야 한다>
한편 경건해지려고 하는 성품 때문에 그들은 이같은 난관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 혐오감에 대하여
언급하셨다.(요 21:18)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순종의 마음으로 가득 차
주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든 감정들을 길들이고 제어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역경에는 언제든지 우리를 갉아먹는 비통함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에 시
달릴 때 신음하고 불평하면서 건강을 희구하게 된다. 고통, 눈물, 신음의 와중에도 "그러나
주께서 원하시니 주의 뜻을 따르자" 하는 생각이 들 때 우리의 마음은 다시 힘을 얻어 우리
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일들을 기꺼이 견딜 수 있게 된다.
고난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한다. 그러나 그분을 거역해보았자 헛일이므로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는 타율성이 아니다. 분명히 가난 추방 투옥 모욕 질병등의 역경이 우리를 엄습해온다
할지라도 이것들은 모두 주님의 뜻과 섭리하심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만한다.
우리는 인내를 붙잡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선하고 유익하다고 간주하는 것 외에 우리
를 기쁘게 하는 그 어느 것도 옳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므로 자비로우신 성부께서는 우
리를 고난으로 이끄시는 동시에 구원을 베푸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신다.
주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가 다만 행복하고 쾌활한 마음으로부터 만 나올 수 있다면 십자가
의 처참한 고통은 필히 영적인 기쁨으로 부드러워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인의 지상생활과 영원한 삶
"지상생활의 허무함"
그리스도인은 지상에서의 삶을 조롱하는 일에 익숙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내세의 삶에
대한 명상을 하도록 자신을 고취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야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영생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상태
가 동물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의 계획과 의도 체계 활동은 모두 땅과 관련된 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은 외견상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부와
명예, 권력의 현란한 빛에 현혹되어졌고 탐욕, 욕정에 사로잡혀 땅의 일에 사로잡힌 나머지
위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게 하심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일깨워주신다. 세상에서의 평화와 안식을 갈구하지 않게 하시기 위
해 전쟁, 재난을 주시며 지나친 탐욕에 빠져 부를 동경하지 않게 하기 위해 땅을 황폐하게
하기도 하신다. 겉으로 존귀하게 보이는 현세의 삶이 불안, 근심으로 철저하게 비참한 것이
요 행복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될 때 십자가의 단련은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땅위에서의 생활이 쾌락과 은총과 감미로움으로 우리를 강하게 유혹하기 때문에 우리는 때
때로 현세에서의 삶으로부터 뒤로 물러나 봐야 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과 관련시켜 볼 때 인간의 상
황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아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자가 누구인가?
주님은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의 부주의함을 깨우시며 그 결과 이 세상을 경멸하며
전심으로 내세에 관심을 가지게 하신다.
<지상에서의 생활에 대한 감사>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땅위에서의 삶을 조소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증오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주님의 관대하심을 증거하는 것이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표이지만 또한 사소하지만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의 손으로부터 받는 축복을 통
해서 우리에게 성부로서 드러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성도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시고 보존하시며 그의 영광을 위
해서 땅위에서 영적 전투를 하도록 명령하시고 승리를 약속하셨다.
땅위에서의 삶은 우리에게 더 큰 계시를 추구하게 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격려한다. 한
편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불행으로 가득 찬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는데 이것도 하나님
의 자비이다. 이같은 사실을 깨달아야만 선천적으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나친 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영생에 대한 열망>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비참함을 깨닫고 이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으로부터 떠나 하늘나
라의 삶을 묵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땅 위에서의 생활은 하늘나라에 비교한다면 당연
히 조롱의 대상이요 연기와 같이 취급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삶이 우리에게 죄에
복종하도록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삶을 결단코 증오해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은 육체라는 감옥에 대해 절망하며 벗어나기를 바랬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삶이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단언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살
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가 죽음을 소망하고 이 땅의 썩어질 삶을 조롱하며 포기하는 삶을 사는 것은 죄
악이 우리를 죄의 사슬에 얽어매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도 유익한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만한 빛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
다. 죽음에 의해 불행한 땅의 유배생활로부터 벗어나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면 우리에게 소
망을 줄 대상은 바로 하나님 나라뿐이다.
인간은 불멸을 갈망한다. 피조물도 해방될 심판의 날을 갈망한다고 하는데 자연의 빛을 받
고 성령의 조명을 받은 우리는 필히 육신의 후패를 뛰어넘어 우리의 눈을 높이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구주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온갖 악과 불행으로 가득 찬 이 심연으로부터 건
져낸 후 영광의 기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영생이 주는 위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현세적인 일들에 관한 생각을 뛰어넘어 마음을 위로 향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철저하게 불행해졌을 것이다. 악인이 부와 영예를 누리고 오히려
의인이 악인에 의해 대우받지 못하는 세상이지만 그들의 생각이 위로 향해있다면 그들은 어
렵지 않게 견뎌나갔을 것이다.
그들이 갈구하는 마지막 날에 주님이 신자들을 모아 모든 눈물을 씻기시며 영광으로 관 씌
우시고 기쁨으로 옷 입히시는 반면 악인은 처참한 고통과 통곡과 이를 갈게하시며 신자에게
굴복하게 하시는 날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야 한다.
<지상의 제물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들>
우리는 필요보다 쾌락에 도움되는 일에 끌리는 경우가 있다. 이 세상이 단지 통과하기만 하
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제물이라는 것에 대해 순례의 길을 가로막는 것
이 아니라 더욱 잘 가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재물은 말썽의 소지가 많은 것이다. 어떤 경건한 이들은 큰 악을 저지하려는 대의를 제외하
고는 재물사용을 금하는 지나친 엄격함을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어떤 이는 그 고삐를 지나
치게 늦추는 경향도 있다. 나도 어떤 형식이나 규례를 제한시킬 의도는 없다.
자세한 것은 다음 장부터 논의하기로 하겠다.
<땅위의 제물의 목적>
하나님이 정해주신 선물들은 그것을 정하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은 꼭 필요성에 의해서만 사용하라고 만들어놓으신 것이 아니다. 예
를 들면 옷을 필요한 분량만 입는 것이 아니다. 때에 따라 알맞게 입게 하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풀 나무 과일도 주님이 제정하신 다른 용도들 외에 그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
의 감각을 즐겁게 하며 또한 그의 향기로 우리를 즐겁게 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화들을 우리들을 위한 것이므로 그의 진정한 창조를 인식하고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자.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악한 욕정에 사로잡혀 우리의 마음을 내놓
고 욕정으로 마음의 눈을 멀게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눈이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화려함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옷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물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을
남용하는 것은 절제되어야 한다.
<영생에 대한 동경>
이같은 묵상으로부터 두가지 규칙이 나온다.
첫 번째는 세상을 사용하고 있는 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결혼한 자들
은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물건을 사는 자들은 물건을 사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두 번 째는 인내하는 마음과 평화로운 마음을 품고 가난을 견뎌내며 풍부한 재활을 규모있
게 사용하라는 것이다.
신자는 몸을 요란하게 치장할 필요는 없다. 피상성과 과시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하며 결코 무절제해서는 안된다. 가난한 자들 또한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평
하지 않고 소유하기 위해 애쓰지도 않아야 한다.
이런 것에 대해 유익을 얻지 못하는 자는 반대의 상황에도 마찬가지이다.
천한 옷을 입고 부끄러워하는 자는 비싼 옷을 입으면 자랑하게 된다. 빈약한 식사에 만족할
줄 모르고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자는, 충분한 식사가 공급되면 주체하지 못한다.
비천하고 어려운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모르고 기 비천함을 고통스럽게 여기고
안달하는 자는 명예가 찾아오면 교만하고 거만해진다.
<땅위의 제물을 청지기처럼 관리하라>
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우리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위탁되어진 것들에 대해서 언젠가는 그것을 회계해야 할
것이다. 회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절제, 신중, 자제, 중용을 천거하시며 모든 무
절제, 교만, 허영, 헛됨을 증오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제물을 사랑에 입각하여 경영하도록
요구하신다.
<주님의 소명과 땅위의 삶>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삶의 모든 행위를 할 때 그의 부르심에 주목할 것
을 명령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아무도 아무런 생각없이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게 하시
기 위해 주님은 그 같은 삶의 양식들을 '소명'이라고 이름지으셨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
기 자신의 위치를 주님께서 지정하신 초소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는 무차별하게
이곳저곳을 방랑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어리석음을 면할 수 있다.
소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바른 길로 걸을 수 없으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임무를 완
수할 수도 없다. 그가 아무리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아도 소명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의 여러 부분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소명을 의식하면서 삶을 영위해간다면 정
연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기도론
인간에겐 조금도 선한 구석이 없다. 인간을 구원할 능력도 인간에겐 없다. 그러면 그는
어디 가서 도움을 호소해야 하는가? 자기자신이 아닌 다른 근원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자신을 계시
하신다는 것도 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가난한 자에게 부요함을, 불행한 자에게 복을 주시며 하늘 창고
를 열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없는 믿음 안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묵상하며
의심 없는 기대 안에서 그를 기다리며 의심없는 소망 가운데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그 안
에서 안식한다. 논리에 얽매인 철학을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신 자 외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이 비밀을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시36:9)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간
구하고 찾으라고 가르친다.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풍요하심을 그리스도안에 두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넘쳐흐르는 샘물을 찾자. 기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께 간구하자. 성부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비교, 골
1:19:요1:16).
어떤 사람에게 땅속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가르쳐 주어도 그는 네 손가락을 주목하지 않
는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요 수여자임을 알면서도 그분의 손안에 있는 선한 것들을 달
라고 그에게 나아가 간구하지 않는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기도의 규칙들
그러면 올바른 기도의 첫 번째 규칙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모든 생각
을 뒤에 접어두고, 우리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모든 관념을 버리며, 자신에 대한 확신을 버리
고 겸손히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라.
다니엘은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가 당신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크신 긍휼을 의지하여 하는 것입니다. 오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
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사 당신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간구하는 것
을 행하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가 됨이니이다"(단9:18f;
비교. Vulgate)
또 다른 선지자는 이렇게 가르친다. "악하고, 연약하며 실패한, 슬프고 쓸쓸한 영혼이 눈
은 쇠잔하고 굶주린 영혼이 당신께 영광을 돌립니다! 오 주여! 우리 선조의 의로움에 의지
하여 당신에 기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 당신께 자비를 구하나이다.
당신은 자비하시오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가 당신 앞에 범죄하였나이다"(Bar.
2:18f;3:2;비교. Vulgate).
두 번째 기도의 규칙은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을 느끼고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
는 바로 그것들을 우리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
후에 주님으로부터 그것들을 얻도록 간구하자. 다른 마음을 품고 간구하면 우리의 기도는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찰 것이다.
하나님께 죄사함을 구하라. 네가 진정을 죄인임을 알지 못하면 너의 기도는 하나님을 조
롱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열심히,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것만을 구하라. 먼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옵소서"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구한 후에
너의 갈증과 굶주림을 구하라.
죄의 짐으로 인해 압박을 받고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두려움에 떨지 말자. 다만 주님께 우리자신을 맡기자. 우리의 비참을 깊이 생각하
고 느끼지 못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눅17:7-10).
하나님께서 기도를 허락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만한 태도로 서게 하거나 우리자
신의 것들을 높이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기도는 고백이요,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아파하면
서 우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근심거리를 부모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듯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한다. 우리의 죄를 의식할 때 우리는 기도하도록 자극받는다.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훌륭한 선조들이 기도를
좀더 집중적으로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두 가지 항목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는 명령이
요 다른 하나는 약속이다. 기도하라, 내게 돌아오라, 필요할 때 나를 부르라. 주님의 이름
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눅11:9-13;요16:23-29;마7:7;11:28;슥1:3;시50:15출20:7).
우리는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며 주님을 신뢰하고 모든 덕, 선, 도움, 보호
를 구해야 한다. 필요할 때 그에게 달려가지 않고, 그에게 간구하지 않고, 그의 도움을 구
하지 않으면 거짓된 이방신들이나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처럼 그의 분노를 끌어들이는 것이
다. 주님의 모든 명령들을 조롱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부르며 주님을 찾으며 주님을 찬양하는 자는 곧 기쁨과 위로를 맛본다. 왜
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수종들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무엇인가? 구하라 그러면 받으리라(마7:7).
시행되리라(막11:24), 응답하리라, 구원하리라, 새롭게 하리라(사65:24;시50:15;91:3;마11:28),
위로하라, 풍족히 먹여 주리라(출34:14f), 놀라지 아니하리라(사45:17).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모든 것들은 굳건한 믿음 안에서 기다리면 모두 성취될 것이다.
기도 그 자체가 구하는 것을 받게 하는 공적이 될 수 없다. 이 약속에 근거해서만 모든
기도의 소망이 이루어진다. 베드로, 바울, 기타 어떤 성도라도(그들이 우리보다 월등히 거
룩하다 할지라도) 기도하면 응답받는 것처럼 우리도 같은 굳건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부
르면 응답받는다는 확신을 마음 속에 가져야 한다.
지도하라는 명령과 우리 기도를 응답해주신다는 약속으로 무장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
도를 중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가치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믿음에 근거한 것
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만 믿음안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의 약속을 신
뢰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면서 진리를 의심하고 응답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의심
하는 자는 어떤가.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을 불러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다. 그들은 이리저리 밀려 다니는 파도와도 같다(약1:6). 믿음이 아니면 아무 일도 우리에
게 일어날 수 없다.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구하는 바가 주어진다(마8:13;9:29;막11:24).
기도의 구성요소들
기도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간구요 하나는 감사이다. 간구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소원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다. 주님의 선하심에 호소하면서 주님의 영광에 봉
사하는 것과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구하는 것이다. 감사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들을 주셨음을 찬양을 통해 고백하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축복들이 오직 주님의 선하심
덕분에 찾아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한다. "곤고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구할 것이며
너는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눅18:1;21:36;엡5:20). 우리는 빈궁하고 큰 근심으로 압
박을 받고 있다. 아무리 거룩한 자라도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며 간구해야 한다. 그때 우리
는 하나님이 쏟아 부어 주시는 축복에 압도당하며 수많은 강력한 기적을 보고 우리가 바라
보는 곳이 어디인지 분별해낸다. 그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소망과 부요함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
면 우리, 혹은 우리가 가진 것들이 번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상 우리들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비교, 약4:14f). 주님의 손길과 그
뜻 아래에서, 그의 도움을 바라보면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말하고 행하자.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하면서 계획을 짜고 실
행에 옮기는 자,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어떤 일을 시행하려는 자
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선언된다.
하나님은 진실로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신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선물을 받아들이자. 끊임없이 주를 찬양하며 주께 감사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에게 흘러내
리는 주님의 축복들을 적절히 사용할 수 없다. 바울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이 선물들이 거
룩해진다고 말한다(딤전4:5). 말씀과 기도가 없는 선물들은 거룩해 질 수 없다(말씀은 믿음
을 뜻한다).
바울이 말하는 "끊임없는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어떤 상황에서
나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대하며 모든 것에 대하여 찬양드리는 것
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드려야 할 충분한 이유를 우리에게 주신다.
공적인 기도와 사적인 기도
그와 같은 끊임없는 기도는 교회에서 드리는 공적인 기도가 아닌 개인의 경건 생활에 적용
된다. 공적인 기도는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동의를 얻을
때만 기회가 마련되는 것이다.
"적당하게 질서대로"(고전14:40) 라는 바울의 말은 인위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한 시
간을 정하라는 뜻을 지닌다. 이 시간은 하나님이 설정한 시간은 아니다. 그같은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지정된 공적인 장소를 우리는 "성전"이라고 부른다. 어떤 성전의 거룩성도
기도를 더 거룩하게 하지 못하며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하지도 못한다. 성전은
믿는 회중들이 기도하고 선포된 말씀을 듣고 성례를 집행하도록 시설과 장소를 제공하는 것
뿐이다.
"하나님의 참된 성전은 우리"라고 바울은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하기를
원하는가? 네 자신 안에서 기도하라(고전3:16;고후6:16). 성전 안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가까운 곳에서 들으신다거나 장소가 거룩하면 기도가 더욱 거룩해진다는 생각은 유대인
들과 이방인들의 생각이다. 그 같은 외적 예배는 "신령과 진정을 바쳐 경배하라"는 요한의
말씀과 대립된다. 장소를 의식하지 말라(요4:13).
기도의 목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므로 (찬양이든 간구이든)기도의 본
질은 마음과 가슴에 있는 것이다. 기도는 마음속의 내적 감정을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
님 앞에 쏟아놓는 것이다(비교, 롬8:27).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최선의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문을 닫고 네 침실로 들
어가라. 네 아버지께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계신 그분이 들으시리라" 허망
하게, 의식적으로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위해 드리는 위선자들의 기도를 하나님은 배격하신
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생각을 집중하여 마음속 깊은 곳에 내려가라고 명령하시면
서 우리의 마음을 감정 안에서,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하시면서 우리에게 가까이 나오실 것
을 약속하신다(비교, 고후6:16).
어느 곳에서나 기도하라. 그러나 기도는 은밀한 것이요, 마음의 문제이며 모든 염려로부터
멀리 떠나 고요한 중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기도 중에 간간이 들리는 음성과 노래는 마음깊은 곳에서 솟아나와야 한다. 입술이나 목
구멍으로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남용하고 그의 장엄하심을 조롱하며 주
님의 분노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
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기도 중에 말하고 찬양하는 것은 마음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어야하며 그 감정의 표현을 돕
는 것이어야 한다. 기도하는 언어와 찬송으로 훈련받지 않으면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하는
마음이 성급하고, 대중이 없고, 조심성 없는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몸의
여러 지체들 안에서 특히 혀를 통하여 빛나야 한다. 혀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하도록 지
음을 받았다.
혀의 주요 임무는 신자들이 모였을 때 드리는 공중기도시에 한 목소리와 한 입으로 함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한 영과 하나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적으로 고백하는 형제의 고백을 받으며 그의 본을 받아 우리의 고백을 나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희랍어를, 불어나 영어를 사용하는 자들 중에서 라틴
어를 사용해선 안된다. 공중기도는 온 회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어로 해야한다. 온 교
회에 유익을 끼치라.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는 유익을 주지 못한다. 모르는 언어를 써도 사랑이 있으면 되는 것
이 아닌가?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고전14:16).
사적인 기도든 공적인 기도든 마음이 없어 혀로만 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마음의 힘과 열정이 혀를 통해 표현되는 것을 압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자.
사적인 기도를 드릴 때는 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내적 감정만으로도 우리를 최선의 상태
로 끌어올려 모세와 한나가 했던 저 은밀한 기도를 하게끔 유도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