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주여 누구시니이까?
주여 누구시니이까?(20260419)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1-9)
주어진 만남
인생에는 많은 만남이 있다. 어떤 만남은 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만 또 어떤 만남은 한숨짓게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만남이 행복한 인생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좋은 만남을 기다린다.
그런데 인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중요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 성장할 것인가?”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하지만 그 만남에는 우리의 뜻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자녀들과의 만남도 그렇고, 배우자와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만남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인생은 이렇게 주어진 만남이 이끌어가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수없이 많은 날들을 살아왔지만 우리 인생에서 기억나는 순간은 이 중요한 만남이 있던 날들, 그리고 그 만남으로 인해 새롭게 펼쳐진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다.
성경은 이렇게 주어진 만남을 ‘은혜’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셨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다. 그 만남 속에서 새로운 사명을 받고 살아가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다. 이 만남에는 우리의 의지도, 계획도 반영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만이 역사하기에 은혜라는 말이 너무나 절묘하다.
성경 속의 믿음의 사람들의 인생 역시 중요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가장 극적으로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사도 바울과 예수님의 만남일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인생에 찾아오신 은혜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신 주님과의 은혜의 만남을 기억하고 그 만남이 이끄는 사명의 길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
바울의 생애
성경에서 바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의 모습과 예수님을 만난 후의 바울의 모습이 본질적으로는 동일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이 의아할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유대교에 특별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위해 어떠한 위험도 감수할 수 있을 정도의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바울도 이 열정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을 예수님과 예수님이 전해 주신 복음을 위해 열정적으로 살았다. 다만 그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그가 믿고 따르는 대상이 바뀐 것뿐이다.
1) 이방인의 사도로 예비하신 하나님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열정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그가 살아온 삶의 환경과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으로 유대에서 500km 떨어진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 지역 출신이다. 베냐민 지파였고 신앙적 배경은 바리새파로, 유대교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성장했다. 또한 율법의 교사로 살기 위해 당시 유명한 율법 교사였던 가말리엘의 제자로 훈련 받았다. 그의 독특한 또 하나의 특징은 유대인으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바울은 배경은 유대인이고, 권한은 로마적이며 신앙은 바리새적이었다. 곧 그는 로마, 헬라, 유대의 문화를 모두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보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비된 자를 사용하시고 준비된 사람을 보내신다.
2) 사울과 바울의 두 이름
우리가 사도 바울을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이다. 우리는 흔히 ‘사울’은 은혜받기 전의 이름이고 ‘바울’은 은혜받은 후의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성장 배경에서 보았듯이 그는 헬라문화권에서 자랐으나 유대교의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헬라 이름인 ‘바울’과 유대 이름인 ‘사울’도 있었다.
바울이 이방인의 선교사로 파송되기 전까지는 주로 사울이라고 불렸고, 사도행전 13장에서 바나바와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되면서 그의 이름은 바울로 불리게 된다. 이는 그의 사명이 변했기 때문이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예수님
지금까지 바울의 이름과 생애, 사명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가 본격적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이라는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극적으로 변하게 되었는가이다.
성경에서 사울의 첫 등장은 예루살렘 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의 현장이다. 그때 사울은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의 옷을 지키는 자로, 간접적으로 박해에 참여했다. 그런데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는 직접적으로 박해의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2-3).
그는 주도적으로 이 박해를 이끌어간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행 9:1-2).
사도행전 전체 구조에서 바울의 이야기는 스데반과 빌립 이야기 사이에 놓인다. 바울의 첫 등장인 8장 2-3절과 9장 1-2절은 연결하여 읽으면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런데 누가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지역의 교회를 박해하는 이 두 사건 사이에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이야기, 그리고 사마리아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빌립의 이야기를 위치케 한다. 이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앞으로 스데반의 순교의 길을 갈 것이고, 빌립의 이방 전도의 사명의 이어갈 것임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의 회심을 강조한 9장의 중요성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면 어떻게 핍박자 바울이 스데반과 빌립의 사명을 계승하는 순교자와 이방인 전도자가 될 수 있었는가이다. 이 놀라운 사건은 9장 3-9절에 나타나는 바울과 예수님의 만남 때문이다.
바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간다. 그리고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두 가지 놀라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는 빛이고 다른 하나는 소리이다. 이 두 가지 현상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실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3-5).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빛과 목자의 음성을 의미하는 소리가 동시에 임하면서 바울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빛과 소리가 오직 바울에게만 동시에 임했다는 것이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행 9:7),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행 22:9).
9장 7절은 누가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기록하며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들었다고 말한다. 22장 9절은 바울의 관점으로 같이 있던 사람들은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마치 그날 일어났던 사건을 반대로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바울과 같이 있던 사람들 중 빛과 소리를 동시에 경험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다. 결국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오직 바울만이 하나님의 빛을 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온전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바울의 모든 가치관과 신념은 무너졌다. 우리가 갈망하는 주님의 임재가 이렇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들은 예사롭게 여기는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감동 없는 하나님의 말씀, 그 한 편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것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예배다. 우리는 같은 시간, 동일한 장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진리의 빛의 비추임을 받고 그동안 자신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가던 길에서 눈이 멀어버린다. 그 빛이 너무 밝아서 자신이 열망하며 바라보던 삶의 목표들, 그 꿈들이 이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날마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신다. 우리가 말씀을 펴고 기도하는 순간에도 진리의 빛이 여러분의 인생을 비추어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가게 한다.
이제 우리는 이 빛과 음성이 가져온 바울의 삶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니던 사람이었다. 그가 믿고 순종했던 것은 유대교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빛과 음성으로 임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순간 바울은 이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리고 그분이 예수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목숨 다해 믿었던 신념과 종교적 가치관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하였다. 성경은 그의 비워지고 무너진 모습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8-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는 바울 스스로 비운 것이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왔는가.’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나의 삶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스스로 비운 것이다.
모든 것이 비워지고 상실한 상태가 되자 주님은 바울의 삶을 사명으로 채우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주어진 이방인 전도와 스데반에게 주어진 고난과 순교의 사명이 바울에게 있음을 보여주신다. 이 사명을 받은 후 바울은 비로소 눈을 뜨고 회복을 경험한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행 9:17-19).
유대교의 사명자이던 바울의 인생은 이제 예수 복음의 사명자로 바뀌었다. 이후 그의 삶은 전에 유대교를 위해 열심을 내었던 것과 같이 복음을 위해 목숨을 다해 섬기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인생을 극적으로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답할 차례가 되었다. 바울을 변화시킨 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이었다. 그 만남을 통해 바울은 자신 안에 있던 그릇된 의와 신념, 열정을 모두 비웠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상황에서 다시 주님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맺음말
바울은 후에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변화된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주님이 자신을 찾아오신 것도 은혜였고 사명을 주신 것도,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진정으로 그의 삶이 온통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은혜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의 사명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