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말씀을 흥왕케 하는 동역
말씀을 흥왕케 하는 동역(202604212)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1-7)
한국교회의 현실
전 세계가 놀랄 만한 급격한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는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기독교는 인구의 감소에서뿐만 아니라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교회가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 한다.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부흥의 원인을 사도들의 영적 권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말씀의 흥왕과 성도의 동역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이룬 교회 성장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하여 이방 지역으로 확산된 초대교회의 부흥을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다음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주님의 이 위임 명령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 복음이 어떻게 확산되어 갔는지를 순차적으로 설명한다.
사도행전 2-7장: 예루살렘과 유대에 전해진 복음
사도행전 8장: 사마리아에 전해진 복음
사도행전 10장 이후: 이방지역에 전해진 복음
사도행전 2-7장에서는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회가 세워진다. 그리고 8장에서는 빌립과 사도들에 의해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고, 10장 이후에는 바울을 통해 이방인 지역, 당시 사람들이 땅끝이라고 여겼을 로마 제국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다. 이러한 복음 확산의 과정에서 누가는 교회가 부흥하는 모습을 아주 흥미로운 표현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 12:24)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
‘왕성하다’, 혹은 ‘흥왕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욱사노’의 본래 의미는 ‘식물이 자라게 하다’인데 이 단어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로 하여 사용되었고, 이런 경우는 사도행전뿐이다. 누가는 이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 초대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직접적인 표현 외에도 사도행전에는 복음 전도의 결과로 ‘제자들의 수가 많아졌다’라고 반복적으로 기록한다. 그런데 이 표현들 앞에는 항상 사도들이 전한 말씀에 의한 영적 부흥이 있었다.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된 교회 성장의 근본적인 원인을 사도들의 권위나 그들의 사역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였기에 나타난 결과라고 말한다. 말씀으로 인한 영적 부흥이 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말씀이 흥왕할 수 있었는가? 이제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말씀이 흥왕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려 한다.
동역이 이룬 말씀의 흥왕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는 말씀의 흥왕을 경험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이 본문에 나온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행 6:1).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서 살펴보았듯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맡기고, 사도들은 그것을 분배하여 성도들 사이에 궁핍한 자가 없도록 한 것이다. 신앙 경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에도 갈등이 생겼다.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을 경험하자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유대, 예루살렘 출신으로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이방 지역 출신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재물을 나누는 과정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구제에서 차별받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을 해결하고자 사도들은 일곱 명의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 구제 사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렇게 결정된 사람이 우리가 흔히 일곱 집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행 6:5).
이렇게 선택된 일곱 명의 일꾼들로 인해 구제와 관련된 불협화음은 일단락된다. 그리고 성경은 이 사건의 결과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첫 번째 분쟁을 만났을 때 일곱 명의 일꾼을 세워 이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본문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마무리하기에는 7절이 너무 웅장하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성도의 수가 심히 많아졌고 심지어 제사장 무리 가운데도 이 도에 복종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일곱 명의 일꾼을 세워 구제를 맡긴 일이 어떻게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까?
일곱 집사가 아니라 일곱 동역자
우리는 흔히 이 일곱 명의 일꾼을 일곱 집사라고 부른다. 그래서 현재 교회의 집사직의 기원을 사도행전 6장에서 찾는다. 그런데 집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라는 말이 처음 나온 곳은 사도행전이 아니라 바울이 쓴 빌립보서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 1:1).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일곱 사람을 집사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아마도 사도들이 이 사람들을 따로 뽑은 이유에서 집사라는 단어를 유추했을 것이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행 6:2).
2절에서 ‘접대를 일삼는 것’이라는 표현에서 ‘접대를 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헬라어 ‘디아코네오’가 우리가 집사라고 부르는 ‘디아코노스’의 동사형이다. 그래서 사도들이 세운 이 사람들을 집사직의 기원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디아코네오’라는 단어가 단순히 ‘접대하다’라는 의미보다는 ‘섬기다’라는 의미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는 이 단어가 다음 성경 구절, ‘말씀 사역’ 부분에 쓰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말씀을 섬기는 것)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사도들이 일곱 사람을 뽑아 맡기고자 했던 것은 ‘접대를 일삼는 것’으로, 본래 의미는 ‘식탁을 섬기는 것’이다. 이때 ‘섬기다’에 해당하는 ‘디아코네오’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사도들이 ‘식탁을 섬기는 것’을 일곱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이 전념하려고 했던 것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이었다. 여기서 ‘말씀 사역’의 본래 의미는 ‘말씀을 섬기는 것’이다. 일곱 사람들이 식탁을 섬기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말씀을 섬기는 것이 사도들이 힘써야 할 일이었다. 결국 일곱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집사직으로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회 행정과 사역에 헌신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집사라고 오해하게 한 주요 본문이 다음 구절이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행 21:8).
그런데 헬라어 성경은 ‘일곱 집사’가 아니라 ‘일곱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빌립의 행적에서 그가 전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빌립은 사마리아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다. 만약 이들이 집사였다면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집사가 세례를 베풀 수 있다는 성경적 근거가 될 것이다. 또한 스데반의 사역 역시 전도자에 해당한다. 그는 사도들이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자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였고 최초의 순교자였다.
이렇게 일곱 사람들에 대해 길게 설명한 이유는 사도들이 일곱 사람을 선택하여 예루살렘 교회 앞에 세운 이 일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단순히 교회의 재정이나 구제를 위해 선발된 집사들이 아니었다. 사도들에게 집중되어 있던 교회의 사역과 목양 사역을 동역하기 위해 세운 교회의 일꾼이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말씀이 흥왕을 경험하고 성도의 수가 많아지고 심지어 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를 믿는 도에 복종하는 부흥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사도들과 일곱 전도자들의 역할 분담에서 찾을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사도들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오히려 나누었다. 그것도 주류가 아닌 비주류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교회 행정과 재정, 전도를 맡게 하였다. 이러한 사역의 분리가 말씀의 흥왕을 가져왔다.
사도들이 행정이나 재정에 썼던 힘을 말씀과 기도에 사용하니 말씀의 역사하심이 커졌고, 교회는 시스템을 마련하여 안정되어 갔다. 곧 사역의 분리가 말씀의 흥왕을 가져왔고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 많아지는 양적 성장을, 불가능할 것 같은 제사장들마저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순종하는 복음 전파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주님의 대위임령은 성취되어 갔다.
첫 교회가 보여준 이 지혜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위기가 오면 손을 더 움켜쥔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오히려 손을 펴서 자신들의 권한을 일곱 명의 일꾼에게 나눠주었다. 사역의 분리가 없었더라면 교회는 움츠러들었을 것이고 결국에는 분열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큰 전환점이다.
맺음말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는 한 사람의 지혜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오히려 동역을 이루어야 한다. 동역 속에서 함께 연합함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 위기의 시대에 말씀이 흥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래서 동역은 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사역의 원리다. 우리가 그런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