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6-13)
이름과 출생 배경
이사야는 주전 740-680년까지 네 명의 유다 왕들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인데, 이사야서의 구조는 독특하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았던 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年)로, 이에 대한 기록은 6장에 나온다. 오히려 1장에는 이사야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곧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된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보여준다(사 1:2-4).
그러나 이사야서가 하나님의 심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사야의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사야의 이름은 ‘여호와가 구원이시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이다. 하나님은 심판을 말씀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알리신다.
이사야서의 구조와 주요 내용
구약 선지서를 기록한 16명의 선지자 가운데 이사야가 가장 유명한데, 이는 그가 기록한 이사야서가 성경 전체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먼저 성경이 66권인 것처럼 이사야서도 6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분 1-39장은 구약성경이 39권과 그 수가 같을 뿐 아니라 구약성경의 내용처럼 하나님을 떠나 패역한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한다. 후반부 40-66장은 신약성경 27권과 그 수가 같을 뿐 아니라 신약성경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회복하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처럼 이사야서도 하나님의 회복을 전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서는 성경의 요약본이라 한다. 그만큼 이사야서에는 성전, 메시야, 하나님 심판, 하나님 나라 등 성경 모든 신학이 담겨 있다.
예수님과 이사야서
특별히 놀라운 것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기록함에 있어 이사야서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인용된다는 것이다. 그중 몇 개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에 관해서다. 마태는 임마누엘로 오신다는 아이가 예수임을 말한다(마 1:22-23, 사 7:14). 또한 누가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이사야서 본문으로 설명하고(눅 1:32-33, 사 9:6),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메시아임을 말한다(롬 15:12, 사 11:10).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바울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촛돌이라 하고(롬 9:33, 벧전 2:6, 사 28:16), 마태와 누가는 예수가 오신다는 그 메시야임을 이사야서를 통해 말한다(마 11:5, 눅 7:22, 사 35:5-6).
신약성경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고난도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을 통해 설명한다(마 8:17, 요 12:38, 행 8:32-33, 사 53:4-6).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태는 이사야서를 인용한다(마 27:57-60, 사 53:9). 이처럼 신약성경 기록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이사야서를 통해 증거할 만큼 이사야서가 성경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이사야의 사명: 심판과 구원
이제 하나님이 어떻게 이사야를 준비시켜 부르셨는지 살펴보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준비되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는 대언자가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가 사명을 받는 장면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부정함이 만나는 유일한 곳이 하나님이 죄인에게 사명을 주실 때라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죄인의 부정을 덮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 죄인의 연약함을 감추신다.
그런데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뵈온 이사야의 첫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온 죄인은 멸망케 되기 때문이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하나님은 이사야의 부정함을 직접 해결하시는데 그 방법은 제단의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대는 것이다. 구약에서 정결 의식은 항상 물로 씻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는 숯을 사용하셨을까? 이는 웃시야 왕이 어떻게 죽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웃시야는 자신이 스스로 향단에서 분향하려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나병환자가 되었다. 웃시야의 죽음을 알고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물이 아니라 불타는 숯불, 더 정확하게는 속죄제를 드릴 때 태웠던 짐승의 뼈(혹은 그 살들)의 일부를 그의 입에 대어 그를 정결케 하셨다. 인간은 자신의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곳에서 보여주신다.
이제 이사야 선지자가 준비되었다. 하나님은 그를 그냥 보내실 수도 있는데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며 사명자가 기쁨으로 나서도록 기회를 주신다(사 6:8). 이것이 또한 우리를 부르시는 방식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볼 수 있는 때는 예배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모든 부르심은 예배에서 시작된다. 예배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본 성도는 하나님과의 자신의 존재적 차이로 인하여 절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할 때 우리의 첫 반응은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절망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성도의 심령에 흐르게 하여 우리의 모든 악과 죄를 정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웃시야 왕과 같이 내가 내 죄의 문제를, 나의 연약함을 해결하리라는 사람은 사용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죄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외에는 해결할 길이 없다.
맺는말
이사야의 부르심을 보라. 그의 부르심은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판을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멸망케 하려는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제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긍휼을 통한 구원이었던 것이다(사 6:13).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한 사람을 부르신다.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그루터기에 새싹이 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소망을 전하는 사명 앞에서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답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