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1-10)
예루살렘 입성의 시간적, 공간적 중요성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시기 전 일주일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셨다.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의 모습을 그리는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시간적 의미다. 이 시기는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때이다. 그래서 한 사건 한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에 마가는 마가복음 3분의 1을 이 일주일을 기록하는 데 할애한다.
다음으로 공간적 의미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는 곳이고, 하나님의 통치의 상징인 성전, 인간 왕의 통치의 상징인 궁궐이 있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야 하고, 다윗의 왕궁이 있어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과 탐욕으로 가득한 예루살렘과 성전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새 예루살렘, 새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이동수단을 타고 예루살렘 근처까지 온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면 거기서 내려 걸어온다. 이는 종교적인 경건의 모습 외에 지형적 원인 때문이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순례자와는 달리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은 걸어서 오셨다. 그리고 베다니에서부터는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다. 이는 상당히 의도적이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왕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그렇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수많은 군중들은 이렇게 외쳤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11:9-10).
우리는 군중들의 외침에서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호산나’다.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이제 구원하소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며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주소서”라고 외쳤다.
다른 하나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야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구원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이스라엘의 번영을 회복할,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때에 그들이 누릴 평안을 위한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열렬한 환호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셨다. 이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 이들의 환호는 불과 며칠 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변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를 기다리는가, 아니면 세상의 것들을 채워줄 메시야를 바라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해결사를 기다렸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성전을 허물기 위해서 오신 예수
여리고 성에서도 갈릴리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을 회복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의 기대와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선포하셨다. 이는 그들을 진정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곧 다윗의 나라가 회복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서 하신 일은 살리는 기적이 아니었다. 멸망과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막 13:2).
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시는가. 이는 예수님의 사역과 연결된다. 다윗이 세운 예루살렘이 무너져야 예수님의 새 예루살렘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헤롯이 세운 성전이 무너져야 예수님께서 새 성전을 이 땅에 세울 수 있다(요 2:19).
주님은 우리가 세운 나만의 예루살렘에 하나님 나라를 덧세우지 않으신다. 나의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찬 성전에 예수님의 새 성전을 세우시지 않는다. 먼저 나만의 예루살렘을 무너뜨리신다. 무너짐이 있어야 새로운 세워짐이 있기 때문이다.
맺는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다윗의 나라를 회복해 달라고 하였다. 우리도 자신의 욕망을 따라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를 흔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먼저 우리의 어그러진 것들이 무너져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에 세워지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가 회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