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조건이 아니라 주권을 믿으라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삿 11:29-40)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계약을 하듯 조건을 내걸 때가 있다. 행위로 하나님을 설득하려 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감동시켜 원하는 바를 얻으려고도 한다. 그러나 부르심 앞에서 필요한 것은 조건이 아니라 순종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고, 그분이 주시는 복을 끝까지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입다의 인생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입다의 이름
입다의 이름은 그의 인생을 바라보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입다’는 히브리어로 ‘이프타흐’인데, 그 뜻은 ‘(문 또는 길을) 그가 열 것이다(열고 있다)’의 의미다. 그래서 이 단어는 보통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길을 여실 때, 한 가정의 태에 문을 열어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사용되었다.
아마 입다는 그의 딸이 태어났을 때 태의 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입을 잘못 열었을 때, 딸의 인생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입을 열어 잘못된 서원을 하였을 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막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입다의 등장,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
입다는 사사시대가 시작된 지 300년 정도 지났을 때 부름받은 사사다. 그때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최악이었다. 이스라엘은 사사시대 초창기에 바알과 아세라만 섬겼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들뿐 아니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의 신들을 섬겼다(삿 10:6). 그러니까 이스라엘 주변 나라의 모든 신을 섬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그들을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 자손에게 파셨다(삿 10:7). 이스라엘은 고난 가운데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암몬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입다를 예비하셨다. 그런데 입다는 비천하고 소외받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입다는 요단 동쪽 산악지역 길르앗 사람이었다. 더구나 아버지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그는 본처 아들로부터 쫓겨나 북동쪽에 있는 산지, 돕 땅에 거주하였다. 성경은 그가 돕에 있을 때 잡류가 모였다고 말한다(삿 11:3). ‘잡류’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입다는 출신이 비천하였지만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가족들에게 배척당하고 살던 입다에게 이스라엘의 위기는 기회로 다가왔다.
길르앗 장로들은 암몬의 위협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으로 입다를 생각했고, 입다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길르앗의 통치자가 될 것을 약속했다(삿 11:8). 이에 입다는 장로들에게 역으로 제안한다(삿 11:9). 그는 부르심 앞에 조건을 걸고 나아간다. 그는 조건을 거는 사람이었고 조건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입다의 제안에 길르앗 장로들은 하나님께 맹세함으로 약속했다. 그리고 입다는 하나님께도 조건을 내건다. ‘하나님, 제가 이 사명을 감당하면 길르앗 통치자의 자리를 주십시오.’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삿 11:11).
입다의 사명과 실수
입다는 암몬과 외교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회담은 결렬되었고 이제 전쟁만이 남았다. 하나님의 영이 입다에게 임했다(삿 11:29). 사명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 이제 순종함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러나 입다는 자기만의 준비를 한다. 하나님께 조건을 제시한다(삿 11:30-31). 30절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번역하면 이렇다. “입다가 여호와께 맹세하고 맹세하여 말하길 만일 당신이 암몬 자손을 나의 손에 주고 주신다면.”
입다는 같은 단어를 반복한다. “내가 맹세하고 맹세하니 하나님도 주고 주셔야 합니다.” 마치 자신의 맹세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내는 것처럼 하나님과 계약을 한다. 그리고 그가 내건 조건은 이것이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1).
입다는 왜 이렇게 조건을 거는 걸까. 이는 그가 가나안 문화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고 자체가 가나안 문화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가나안 신앙은 인간이 하나를 주면 신도 하나를 주는 형태였다. 만약 우상에게 많은 것을 주면, 우상도 많은 것을 줄 것이다. 입다는 이 사고방식 아래 마치 우상 대하듯 하나님과 거래를 한다.
결국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는 그가 내건 조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입다의 승리는 곧 비극으로 바뀐다. 그의 집에서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이 바로 그의 무남독녀였기 때문이다. 기쁨을 누려야 할 승리가 그의 잘못된 서원으로 비극으로 바뀌게 되었다.
맺는말
입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삶의 원리를 알려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어떤 조건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분도 아니시다. 하나님이 영이 임하시면 우리의 조건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때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며 순종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주인이시고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종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끝까지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