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하나님을 본 받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4:25-5:2).
새 사람을 입은 성도에게 합당한 삶
바울은 앞부분에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다(엡 4:22-24). 그리고 이제는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이 살아야 할 삶과 버려야 할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런데 바울의 관심은 여기서도 교회로 향한다. 성도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 새 사람은 혼자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개인이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세워가는 사람이다. 바울은 새 사람을 입은 성도가 살아야 할 삶 네 가지를 말한다.
첫째,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바울은 가장 먼저 거짓을 버리라고 한다. 거짓과 옛 사람을 동일시한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아 살아가는 옛 사람의 가장 뚜렷한 흔적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사탄이 거짓의 영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다(요 8:44). 그래서 바울은 새 사람을 입은 사람에게 거짓을 버리라고 한다. 여기서 ‘버리다’는 ‘벗어버리다’(엡 4:22)와 동일한 헬라어로,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죄악의 모든 흔적을 벗겨내는 것을 말한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말을 하여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체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서로 연결되어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서로를 신뢰하며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이 ‘말’이다. 성도의 ‘말’은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고 세울 수도 있다. 만약 성도가 서로에게 거짓을 말한다면 공동체는 흔들릴 것이다.
둘째, 분노 중에 죄를 짓지 말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헬라어 성경은 26절을 이렇게 기록한다. “분을 내라. 그러나 죄를 짓지 말라.”
성경은 우리에게 무조건 참으라고 하지 않는다. 분을 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분을 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분노가 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가 지기 전에 풀어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속 내 안에 화를 담고 있으면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미움으로, 복수의 감정으로 변하면서 내 안에서 악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렇게 지속된 분노는 마귀에게 우리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게 한다.
셋째, 도둑질하던 손이 구제의 손이 되도록 하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당시 사회는 도둑질을 금기시했다. 그런데 거것이 만약 생존과 관련된다면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여겼다. 생존이 최고의 가치였다. 만약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면 어느 순간 삶이 고달파질 것이다. 노동이 자신만을 위하면 삶이 피곤해진다. 그래서 바울은 내 노동을 통해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한다. 노동의 의미를 생존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돕는 데서 찾으라고 한다. 그때 노동은 즐거워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넷째, 선한 말로 은혜를 끼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하나님의 은혜는 내 입의 선한 말로 전달된다. 그래서 ‘더러운 말’은 하지 말라고 한다. ‘더럽다’는 것은 ‘악취가 나다’, ‘썩다’의 의미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나고, 못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난다고 하셨다(마 7:14). 여기서 ‘못되다’가 ‘더럽다’와 동일한 표현이다. 더러운 말은 못된 말이다. 더러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옳은 말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말이라면 그것은 더러운 말이 된다.
새 사람의 사명, 하나님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는 것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계속 옛 사람의 삶을 살아간다면 성령이 근심하신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근심하다’라는 표현은 ‘슬퍼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바울은 성령이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는지 이렇게 말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바울은 단순히 우리에게 상대방을 배려하라,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대하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새 사람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바울은 새 사람의 삶의 원리를 두 단어로 말한다. ‘용서’와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가장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섬기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섬기자고 권면한다.
맺는말
바울은 성도의 삶의 모형을 삼위 하나님의 열심에서 찾는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길을 인도하시고 기다려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성도들 가운데 거하면서 누군가를 인도하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나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자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는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낮은 곳에서 지체를 섬겨야 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본받음의 정점은 ‘용서’와 ‘사랑’이다. 용서와 사랑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버리고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어진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