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왕의 슬픈 귀환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눅 19:28-44).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예수님께서는 평생 갈릴리에서 사역하셨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달리시기 1주일 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일주일을 그곳에서 보내고자 하셨을까?
먼저 시간의 중요성이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마지막 일주일은 3년 공생애를 총정리하는 시간이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 이후 복음 사역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또한 공간의 중요성이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다윗 왕궁이 있었던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성전의 주인이셨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이스라엘 왕이셨다. 성전과 왕궁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그분의 마지막 사명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위협 속에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시기 전 여리고에 들르셨다. 그런데 누가는 여리고에 들리신 예수님과 예루살렘 입성 사이에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한 이야기를 넣는다. 그것은 열 므나 비유다. 한 귀인이 왕으로 선택되어 왕위를 받으러 떠나게 되었다. 떠나기 전, 종들에게 열 므나를 나누어 주고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였다. 왕권을 받아 돌아온 귀인은 종들이 어떻게 장사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열 므나 남긴 종에서는 열 고을 다스릴 권세를, 다섯 므나 남긴 종에게는 다섯 고을 다스릴 권세를 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은 심판하였다. 여기까지는 달란트 비유와 비슷하다. 그런데 이 비유의 결론은 이렇다.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눅 19:27).
예수님께서는 왕권을 받아 내 나라로 돌아오는데, 내가 왕되는 것을 막고 방해했던 자들을 심판하러 가노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 이르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 가까이 오셔서 그 성을 보시고 우셨다(눅 19:41-44).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바라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심판주로, 또 한편으로는 심판 받은 성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입성하셨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에수님께서는 베다니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제자 둘을 보내어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 오라고 하셨다. 다른 순례자들은 나귀나 말을 타고 오다가도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면 내려서 걸어간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에 대한 예의였고, 그곳의 지형적 원인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걸어가시다가 예루살렘 가까이에서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셨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귀는 왕이 타는 짐승이었다. 그중에서도 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였다(슥 9:9).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구약에서 약속되어 왔던 그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왕은 그 나라의 모든 것을 자유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니 타인 소유의 나귀 새끼도 당당히 풀어오라 하신 것이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장면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 19:37-38).
누가는 의도적으로 군중들이 외치는 소리를 제거한다. 특별히 세 복음서에 등장하는 ‘호산나’, ‘다윗의 나라’라는 단어를 뺀다. 그리고 제자들이 외치는 소리만 넣었다. 이방인인 누가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약속된 메시아가 아니고 온 세상의 왕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세계 모든 족속과 모든 민족을 위해 오신 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가시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가까이에서 우셨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 땅에 가져온 것은 ‘평화’였다(눅 19:38). 그러나 예루살렘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왕을 죽였을 때, 그들에게 임할 결과는 멸망이었다. 후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비참하게 멸망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바라보시고 우신 것이다.
말씀 적용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다. 당당하게 우리의 삶의 주인 자리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점령하지 않고 평화로 통치하신다. 주님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면 하늘의 평화가 임한다. 반대로 주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혼돈과 무질서, 분열과 분쟁이 우리 삶을 붙들고 예루살렘 성처럼 멸망할 것이다. 여러분은 누구를 왕으로 모시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