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화평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1-18)
복음은 우리의 존재를 회복시키고 좋은 사람 되게 한다. 그로 인해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깨달아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섬김이 회복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화평’이다.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형은 고대 아시리아에서 전쟁 포로들을 나무에 매단 것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고통스럽게, 긴 시간 죽이는 공개 재판이 십자가형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의 상징이었다. 그들에게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명확한 율법이 있었다(신 21:22-23).
그러나 성도들에게 십자가는 은혜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달리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벌과 저주,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가 하나님의 은혜, 속죄, 사랑으로 역전되었다.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에서 우리의 삶이 시작되었고 우리 존재가 변화되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십자가는 우리의 삶에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로, 십자가는 우리를 ‘예수 밖’에서 ‘예수 안’으로 변화시켰다. 전에 우리는 예수 밖에 있었고 언약 밖의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소망 없고 가망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 안으로, 예수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정체성’이 변한 것이다(엡 2:19).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단순히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정체성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목표, 인생의 방향, 푯대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신분의 변화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목적과 방향의 변화까지를 포함한다. 이제 예수 걸어가셨던 길이 우리 인생이 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안으로 들어온 목적이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서라고 말한다(엡 2:10). 곧 사명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 16:24) 따를 것을 말씀하신다. 나의 목적, 나의 계획, 나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겠다는 고백인 것이다.
둘째로, 십자가는 멀리 있던 우리를 가깝게 하였다. 멀리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또 성도와 성도가 서로 연합하도록 하였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여기서 ‘멀다’라는 개념은 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것, 그리고 감정적으로 멀리 있는 것 모두를 가리킨다.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었으나 감정적으로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생각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마음이 공동체를 멀어지게 한다. 우리가 화합하고 연합할 수 있는 원리는 다음이다. ‘내가 틀릴 수 있다’, ‘나와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
하나되게 하는 십자가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한 공간에 있지만 성도들이 서로 점점 멀어지는 것이었다. 바울은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단계적으로 말한다.
먼저 미움, 증오, 질투, 시기 등으로 세워졌던 담을 십자가의 사랑이 허물어 버린다. 십자가는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담을 허물어 둘이 만나게 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그리고 ‘한 새 사람’을 세운다. 유대인과 이방인 각자의 생각을 허무시고, 예수 안에서 이 둘을 ‘한 새 사람’으로 만드신다. 예수의 피가 심장에 들어가 온 몸에 흐르면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뜻을 품고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결합, 곧 교회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5).
최종적으로 십자가는 멀어져 있던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여,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한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7-18). 그래서 성령 안에 거하는 성도들 곁에 있으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된다. 교회는 혼자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달려간다.
초대 교회는 놀라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끊임없이 분열하였다. 바울은 그 이유를 정체성의 문제로 보았다. 우리는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고 본질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교회 안에 있다가 세상을 방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있다가 교회를 방문한다. 세상에 있다가 일주일에 한 번, 교회를 방문하니 변화가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라. 예수 안에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맺는말
주님이 오신 이유는 시기와 다툼, 미움과 질투로 가까이 있으나 멀어지는 사람들을 예수 안에 모으기 위해서다. ‘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공동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 안에서 십자가로 인해 누리는 화평,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화평을 누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