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문 밖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11-23)
Ⅰ. 본문해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자의 비유 세 가지가 나오는데, 첫째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잃어버린 바된 잃은 양의 비유이다. 둘째는, 타의에 의해 잃어버린 바된 드라크마의 비유, 셋째는, 자신의 의지로 아버지의 집을 떠났지만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탕자의 비유이다. 우리는 흔히 탕자의 비유의 주인공이 탕자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관점은 돌아오는 아들이 아니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이 비유는 네 단계를 담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Ⅱ. 기다리시는 하나님
A. 곤궁함
첫째로,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곤궁하게 되었다. 상당한 재산가인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는 아버지가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산 분배를 요구하였고, 아버지가 나누어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렸고,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까지 들었다. 그는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고자 하였으나 그것조차 주는 이가 없어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자의 곤궁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육신의 곤궁함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자유를 찾아 떠난 탕자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마음과 육신의 말할 수 없는 곤궁함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지막이다.
서구사상은 근대를 지나면서 신앙의 자리에 이성을 등극시켜 기독교 신앙의 좋은 유산들을 모두 파괴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났다. 끝없이 높아지던 이성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무너졌고, 이성에 회의를 품는 허무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서구에서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낭만주의는 인간의 사유의 중심점이 이성에서 감정으로 옮겨간 것을 보여주고, 그 이후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그 관점은 의지로 옮겨갔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방식을 취한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풍족함을 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의지하며 살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B. 생각함
둘째로, 탕자는 극도의 궁핍을 경험하며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는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완전한 곤궁함 속에서 아버지의 집과 아버지의 성품을 생각하였다.
생각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으로, 짐승과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성경은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강조함에 앞서 언제나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욕망은 죄와 더불어 인간의 생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올바른 판단을 흐르게 하기 때문에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자신을 정돈하고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일은 양심의 빛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말씀의 빛이 필요하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에 이르는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바를 생각하려고 애쓴다면 생명에 이르게 될 것이다.
C. 돌아감
셋째로, 탕자는 생각한 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하였다. 여기에서 ‘일어난다’는 표현이 신앙적으로 연결되면, 모종의 결단,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용기 있는 동작 등을 가리킨다. 이 돌아감은 물리적인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문제이다. 죄의 힘은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매우 어렵고 힘들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마음을 돌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면 거기에는 이미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D. 회복함
넷째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탕자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힘없이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본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을 먼저 알아보게 하였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측은히 여겼다’는 구절은 창자가 움직이기까지 감동을 받았다는 뜻으로 아버지의 긍휼을 보여준다. 아들의 비참이 아버지의 책임이 아니었고, 아들은 자기의 잘못으로 스스로 비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은 비참의 원인을 생각하지 않게 한다. 이것이 긍휼이다. 아버지는 가장 좋은 옷으로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가락지를 끼워 법적인 상속자의 권한을 회복시켰다. 발에 좋은 신을 신겨 신분을 회복시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큰 기쁨의 잔치를 하였다. 그 이후 아들은 이전의 실패를 기억하며 아버지를 더 사랑하며 순종했을 것이다. 버려진 돌 같았던 예수가 이방인의 교회의 모퉁이돌이 되고,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Ⅲ. 결론
하나님은 지금도 긍휼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런데 잃어버린 영혼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 있으나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렇게 엄마같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으니 궁핍함 가운데 있지 말고 풍족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한다. 여러분이 손을 놓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신 주님께로 돌아가 주님과 평화를 누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