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Ⅰ.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진실하심을 찬양한다. 할렐루야는 ‘할렐루’의 복수형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진실하심은 무엇일까?
Ⅱ. 진실하심을 찬양함 A. 진실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실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에메트#이다. 그리고 #에메트#는 #아만#이라는 동사에서 왔다. #아만#은 ‘굳건하다’, ‘양육하다’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에메트#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등가 번역이 쉽지 않다. #에메트#는 우리말 성경에 ‘진리’로 많이 번역되었고, ‘진실’, ‘신실’으로도 번역되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진실하심’으로 번역되었다. ‘진실하다’라는 말은 진리에 합치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실하다는 표현을 하는 게 가능하냐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이시고 그 진리에 언제나 합치되게끔 행동하시기에 그분이 진실하다고 하여도 무방하다. 이에 비해 ‘신실하다’라는 말은 진실한 성품, 진실한 존재를 관계에 적용할 때 나타나는 변함없음을 뜻한다. 신실한 이 관계는 언약 관계에 적용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할 때 이것은 반드시 언약 관계를 기초로 한다. 어떤 사람을 진실하다고 할 때 그 기준은 진리이다. 진리가 있고 거기에 합치된 상태가 진실이다. 간혹 진리에서 이탈할 때도 있겠지만 언제나 다시 진리로 돌아와 거기에 합치되는 것이 진실이다. 진실한 사람은 믿을 수 있다. 그는 관계에 있어서 항상 신실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것만큼 신실하다.
B. 신실한 자들에게 드러난 성품 본문에서는 ‘진실하심’보다는 ‘신실하심’이 더 좋은 표현인 것 같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신실한 자들에게만 드러난다. 모든 것이 명백하면 신실함을 믿고 말고 할 것이 없을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앞의 현실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을 수 없게끔 전개된다. 그렇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삶의 사태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신실하심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진다. 우선, 객관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성령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주신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이다.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객관적으로 있는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진실함과 신실함, 진리를 별도의 것으로 각각 보여주신다기보다는 한 하나님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신다. C. 신실하심을 찬양함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찬양하였다. 신실하심이 찬송 제목이 된 이유는 인자하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호의가 인자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자하더라도 그것이 변덕 많은 사람의 사랑처럼 주어졌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주어진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순간에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필요하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님이 신실하기에 이 사랑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신실하시다는 사실에만 만족할 수 없고 그 신실하심을 자신이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라고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우리의 마음은 수없이 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신실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 사랑 안에서 평안을 누리길 바란다.
Ⅲ.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과 내일 달라지는 사랑이 아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 사랑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어찌 인격적인 사랑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랑은 신실한 사랑이 이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고 그분을 신뢰하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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