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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에드워즈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에 대하여 설교자 : 더글라스 스위니 교수 작성일 : 2017.11.19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에 대해 말하다

더글라스 스위니(Douglas A. Sweeney)
- 트리니티 신학교 교회사 교수, 에드워즈센터 디렉터

음울하고 남의 흥이나 깨는 청교도. 이것이 바로 18세기의 유명한 대각성의 지도자,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에 대한 흔한 이미지이다. 그는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힌 죄인들>이란 설교에서 회중들이 지옥불 위에 가느다란 줄로 매달려 있다고 설교한 사람이다. 그의 유명한 초상화를 보면 이런 평가가 더욱 확실해진다. 1750년대 초에 조셉 벳저(Joseph Badger)가 그린 초상화 –에드워즈를 직접 보고 그린 그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는 그를 마치 여름휴가를 한 번도 즐겨보지 못하였거나 초콜릿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우울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여름휴가도 즐겼고, 초콜릿도 먹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리스인의 삶을 사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는 신자들이 신앙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번은 이렇게 설교했다. “신앙생활이 오직 기쁨이기만 하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참으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기독교가 우리의 인생과 삶의 여러 관계에 있어서 새롭고도 기쁜 조화를 가져다 준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 서로에 대한 선한 의지, 형제애, 상호간의 박애, 너그러움, 그리고 서로의 안녕에 대한 감정을 낳는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인간관계를 “달콤”하게 하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기뻐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진정한 기독교로 회심할 때 실제로 기쁨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1721년 봄에 경험한 그의 회심이 자기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구원의 방식에 대한 내적인 “달콤한” 감각을 가져다주었는지 이렇게 회상했다. “내 영혼은 그것들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데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지성은 그리스도에 대해 읽고 묵상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위격의 아름다우심과 탁월하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는 은혜로 주어지는 사랑스런 구원의 방식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생각들 속에서, 에드워즈는 그의 영혼이 “이 세상의 모든 염려들로부터 벗어나 고요하고 달콤함 속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인식적인 경험이 아니라 친밀감에서 오는 기쁨이었는데, “산꼭대기나 외딴 광야에 홀로 앉아서 그리스도와 달콤한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께서 꼭 안아주시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에드워즈는 거의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이 이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일에 헌신했다. 복음 사역자로서 그가 평생 추구한 “참된 신앙”이 바로 마음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구속하실 때 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정위(正位)하시고, 우리의 ‘정동’을 변화시키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들의 근원이시라면, 에드워즈는 우리의 가장 깊고 가장 열정적인 열망과 갈망은 주님과 주님의 방법 안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된다고 확신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번영하며, 주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 목적인 사랑과 기쁨을 경험한다는 말이다.

철학사에서 기독교 “행복론”(eudaemonism) -다소 부정확한 용어인 기독교 “희락주의”(hedonism)‘라고도 불리는데 존 파이프와 그 밖에 다른 저자들의 작품 속에서 익숙한 용어임-이라 불리는 이 번영에 대한 에드워즈의 생각을 이제 살펴볼 것이다. 에드워즈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핀 후에, 인간의 번영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의 본질과 역사적인 중요성에 대해 제시할 것이며, 이것이 그의 사상 전체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개요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 이스트 윈저의 회중교회 목사관에서 티모시 에드워즈 목사와 에스더 스토다드 에드워즈 부인 사이에 5번째 자녀, 외아들로 태어났다. 에드워즈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유명한 목사들이었지만, 에드워즈가 목사와 선교사, 부흥의 주역, 그리고 프린스턴대학교의 총장이 되면서는 그의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목사관에서 아버지에게서 문법을 배웠는데 고대 헬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하고 히브리어를 조금 배운 후에 1716년 9월, 12세의 어린 나이에 예일대학교에 입학했다. 1720년에 대학과정을 마쳤으며, 그 후에 계속 뉴헤이븐에 남아 대학원 공부를 했다. 에드워즈는 1721년 봄에 회심을 경험했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그의 동료이자 훗날 그의 사위가 되는 아론 버에게 보낸 서신, 흔히 『자서전』 (Personal Narrative)이라고 알려진 그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1726년 8월, 에드워즈는 매사추세츠 노샘프턴에서 그의 연로한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의 동사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1727년 2월 15일에 안수를 받고 곧바로 그 마을의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또 같은 해 7월에는 뉴 헤이븐의 제임스 피어폰트 목사의 딸 사라 피어폰트와 결혼도 하였다. 두 사람에게는 11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딸이 8명, 아들이 3명이었다. 그 후 1529년 2월에 스토다드가 죽자 불과 25살이었던 에드워즈는 서부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유명하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에드워즈는 회중들을 두 번의 부흥(1734-1735년, 1740-1742년)으로 이끌었지만 교구민들이 새롭게 발견한 영적인 강렬함을 유지하는 일에 실패함으로써 점차 좌절되었다. 여러 번의 개인적인 논의와 공개적인 논의 끝에, 에드워즈는 그동안 개인적인 회심에 대한 검증 여부와는 상관없이 모든 회중에게 성찬을 허락하던 오랜 관례를 뒤집었다. 이 결정 때문에 에드워즈는 1750년 6월에 사임을 하게 되고, 이후에 메사추세츠 스톡브리지에서 수년 동안 선교사겸 목사로서 모히칸 인디언과 모호크 인디언들을 목회했다. 그리고 1757년 말에 남부로 옮겨 프린스턴대학교의 총장으로 부임하는 일을 승낙하였다.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천연두 예방주사를 맞았는데 그로 인해 심한 열이 나고 목구멍에 발포가 생겨서 아무 약도 먹을 수 없게 되었고, 1758년 3월 22일, 54세를 일기로 프린스턴에서 소천하였다.

에드워즈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의 영적이고 신학적인 논문들은 생전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출판되었고, 그 이후 다른 대륙들에서도 수많은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은 1749년에 출판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Life of David Brainerd, 1749)로서 인디언 선교를 하다가 1747년에 에드워즈의 집에서 세상을 떠난 젊은 선교사에 관한 책이다. 에드워즈는 또한 설교들과 부흥에 관한 논문, 성찬에 관한 논문, 그리고 『신앙감정론』 (Religious Affections), 『의지의 자유』 (Freedom of the Will), 『원죄론』 (Original Sin), 『천지창조의 목적』 (End of Creation), 『참된 미덕의 본질』 (Nature of True Virtue) 등의 신학 논문들도 출판했다.


에드워즈의 “행복론”의 본질과 중요성

에드워즈는 교육가, 목사, 선교사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늘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에드워즈가 생각한 바로는, 인간의 번영은 하나님의 축복된 구속 사역에 기반을 두고 있고, 사람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데에 있었다. 행복론은 단순히 에드워즈가 뒤늦게 고안해 낸 생각이나 학문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멀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열정적으로 간구하던 기도의 결과였으며, 성경의 빛 아래서 이뤄진 실재의 본질에 대한 확장된 숙고였다.

이런 묵상을 한 사람은 에드워즈가 처음이 아니다. 에드워즈의 사상은 보통 행복, 안녕 혹은 번영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유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라는 단어를 묵상하던 고대의 윤리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BC 340년경에 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Nichomachean Ethics)인데, 초대 헬라 교부들이 이 책을 가장 먼저 탐독했으며, 그것이 서방에 전해져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 책은 유다이모니아를 미덕의 관점 또는 선의 관점에서 정의한다. 이 책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행복 또는 번영에는 한 사람이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들에 자기의 의지를 맞추고 자기의 인격을 배양해서, 결국 그것이 자기의 습관이 될 때까지 미덕들을 연습함으로써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담겨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오직 성령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사람의 ‘정동’을 초자연적으로 변화시키시고, 새 마음을 주시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 원하도록 해 주실 때 가능하다. 하지만 기독교 행복론자들의 경우에도, 은혜는 우리 속에 있는 갈망과 열망을 제거해버리지 않으며 오히려 그 열망과 갈망을 바른 길로 인도해서 그것을 만족시켜 준다. 기독교 행복론자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으로 선하고 행복한 삶에 대한 갈망 - 간단히 말해서 자기사랑-과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대한 갈망이 하나로 수렴된다고 믿었다. 기독교 행복론자들에게 있어서 회심에 대한 요청은 인격적인 성취에 대한 요청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고백록』 (Confessions, 397-400)의 한 기도에서 적고 있는 바와 같이 말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깨우치셔서 주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얻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직 주님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 결코 안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자기 유익 추구는 역사 속에서 항상 논쟁을 일으켜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헬라적인 지혜와 성경적인 지혜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통합 안에서 이것을 명문화했다. 그러나 12세기 초의 피터 아벨라르드를 시작으로 급진적인 프란시스코 수사였던 둔스 스코투스를 지나 중세 후기의 수많은 신비주의자들과 마르틴 루터를 필두로 한 초기 개신교 지도자들은, 자기사랑에 대해 훨씬 덜 낙관적인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고대 기독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이 견해를 지지한 사람들, 곧 “윤리적 엄격주의자”라고 불린 사람들은 자기사랑과 이기심 사이에 실제적인 차이가 거의 없다고 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물론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사심 없는 호의”, 또는 “순수한 사랑”이라고 불리게 된 것들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개인의 성취를 경시하는 것을 일종의 거룩함으로 보는 것이었다.

심지어 에드워즈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도 “엄격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고난 받을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입장이었다. 물론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의 자기 유익과 사회적 호의의 균형을 통해 사회적 번영을 추구하던 “계몽주의식 자기유익”은 반대했다. (에드워즈는 계몽주의 시대의 자유주의자들이 죄에 대한 교리에 매우 취약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인간의 잠재력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회심하지 않은 자기사랑의 위험성을 우려했다. 그러나 자기사랑 자체에 대해서는 대단히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자기사랑에 대해 더욱 그러했다.

에드워즈가 고린도전서 13장을 본문으로 설교한 『사랑과 그 열매』 (Charity and Its Fruits) 시리즈 설교 15편 중 7번째 설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기심으로서의 자기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영이 반대하는 것으로서 무절제한 자기사랑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영은 모든 자기사랑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거나 … 자기의 행복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에 반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자기의 행복에 대한 사랑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성을 파괴하려는 일이 될 것입니다. … 자기의 행복을 사랑하는 것은 의지의 기능이 필연적이듯이 사람의 본성에 필연적입니다. 따라서 존재 자체가 파괴되지 않는 한 자기사랑이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유다이모니아는 그리스도인이 부인하거나 억압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악 된 기쁨이 아니었다. 오히려 행복, 번영, 인간의 안녕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의 열매였다. 이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의 즐거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드러내야 할 것들이었다. 에드워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회심하고 성화될 때 나타나는 변화는 행복을 향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향한 사랑의 작용과 영향력, 그리고 그 대상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것만큼 자신의 행복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의 행복을 향한 지극히 큰 사랑의 작용 안에서 열렬하게 행복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동일한 그 사랑의 작용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이 갈망하는 행복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것일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혹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자신의 행복을 두는 것입니다. … 이 행복을 갈망한다면, 그는 자기가 행복이라 여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자기가 행복이라 여기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행복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똑같은 행위 안에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자신의 행복을 하나님께 두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가 강조하는 자기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하나가 증가하면 다른 하나가 감소하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처럼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두 가지 사랑을 함께 추구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영광을 외부적으로(ad extra, 하나님 밖으로) 교통하시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에드워즈가 좋아하는 성구들 중에 하나인 베드로후서 1:4의 말씀처럼)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기쁨 –이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자기사랑을 충족시켰다-을 알아가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비춤으로써 구속받은 자들의 삶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확장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행복한 특권인가! 우리의 행복이라고 여길 수 있는 이보다 더 큰 보증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고, 그분의 영광을 기쁘게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신다. 에드워즈는 그의 가장 어려운 철학적 논문이자, 현재는 매우 유명한 책이 된 『천지 창조의 목적』(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에서 이 사상을 길게 다루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가능한 선의 영원한 충만함이, 모든 완전함의 충만함이, 모든 탁월함과 아름다움의 충만함이, 무한한 행복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이 충만함은 외부로 전달되거나 발산될 수 있기에 이 충만함이 전달되거나 흘러나가는 것, 이 무한한 선의 근원이 풍성한 시내를 이루어 흘러가는 것, 이 무한한 빛의 근원이 그 탁월한 충만함을 발산함으로써 곳곳에 빛을 쏟아내는 것은 사랑스럽고 귀중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은 너무도 위대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그 완전하심을 밖으로 전달하시고 나누어주시고 거듭 되풀이하시면서 그의 영광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확장시킴으로써 스스로 영화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밖으로 흘러 넘쳐서 천지를 채우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로 우리가 존재하게 된 이후, 우리와 같은 피조물들이 윤택해지도록 촉진시킨다.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게 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만족시켜주는 그 영광을 깨닫고, 그 영광을 확대시키고, 그 영광을 즐거워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행복과 피조물의 행복은 서로 상치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강퍅한 죄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자기의 영광을 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당신의 피조물들의 선도 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영광의 발산은 … 그의 피조물의 탁월함과 행복과 교통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 그 풍성한 교통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이 일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피조물들의 선은 하나님 자신과 연합하고 교제하는 것에서 풍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선입니다.

에드워즈는 수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이 논지를 더 설명했다. “이 관점에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전체적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관심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관심은 마치 처음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채로 출발해서 마침내 하나로 수렴하는 두 개의 선과 같습니다. 두 선이 동일한 중심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사랑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구속 받은 자들의 삶에서 일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기 관심과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돌보심은 영원히 일치한다. 사실 후자가 전자의 토대이다. 창조주의 자기사랑은 우리의 존재를 있게 한 우리를 향한 그 사랑에서 나온다. 또한 우리의 자기사랑은 하나님께 사랑을 돌려드림으로써 궁극적으로 성취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완전하심을 받고, 이해하고, 반영함으로써 영원토록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이 교회 안에 있는 자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성도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의미가 된다. 에드워즈는 회중들에게 호소하기를, 하나님 없이 번영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기껏해야 어리석음을 낳을 뿐인데 그런 노력은 우리를 지혜와 사랑과 기쁨의 근원에서 끊어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의 번영과 상관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말라비틀어지고 조악하며 아주 맛없는 열매를 맺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런 노력은 우리가 받은 지혜와 사랑과 기쁨을 약화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드워즈는 회중들에게 이기적인 삶은 자기 파괴적이라고 말한다. 경건한 삶은 더 나은 자기 돌봄과 더 큰 행복으로 인도한다. 참되고 지속적인 기쁨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서, 사회적인 정의와 개인적인 거룩함을 동시에 추구하는 삶을 살 때에 찾아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계획에 따라 살 때에 선하게 되고, 피조물로서 가장 잘 기능할 수 있게 작정해 놓으셨다.

결국 에드워즈는 엄격주의자들의 관심을 올바로 다루었다고 할 수 있는 기독교 행복론을 발전시켰다. 에드워즈에게 유다이모니아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때 찾아오며, 사람의 번영은 십자가의 방식으로 행할 때 찾아온다. 자기사랑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성취된다. 지속적인 행복과 기쁨은 하나님을 따라 살 때 찾아온다. 이것은 매우 모순적이어서, 어떤 사람들은 역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것을 참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에드워즈는 고린도전서 13:5을 본문으로 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를 설교하면서, 다른 어떤 구절에서보다 더 선명하고 강력하게 이 점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의 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를 추구합니다”라고 설교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는 일들은 우리 자신의 일들과 반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이라고 불립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입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영”을 가리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영이라고 정의하면서, 이것이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영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주입된다.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인간의 자기사랑은 조악한 유사품일 뿐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모든 자연적인 사랑을 초월하고 능가하는 초자연적이므로 자기사랑 이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본성적인 애정이나 사회적인 우정으로서의 자기사랑과 악한 인간들이 서로 간에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랑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보다 훨씬 높고 훨씬 고상한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에서 영혼으로 옮겨 심어진 나무입니다. 그것은 신성한 것이며, 거룩하고 복되신 하나님의 영으로 온 것이며, 따라서 자신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성도들이 하나님 자신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릴 때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그 주님과의 연합에서 나온다고 가르쳤다. 또한 초자연적인 은혜가 없이는 인간의 번영이 불가능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번영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주님 안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주시는 행복은 세상의 모든 은금보다 귀하다”는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사실 에드워즈는 자기사랑을 올바로 정의하자마자, 그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위한 삶이 인간의 번영을 낳는다고 되풀이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헌신할 때, 그것은 여러분 자신을 내다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유익이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여러분은 결코 패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일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일과 다른 사람들의 일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익과 행복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증진하시는 일에 여러분보다 훨씬 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즉 세상적인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다른 의미에서 여러분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지름길입니다.


에드워즈의 더 큰 신학적 프로그램 중심에 있는 행복론

에드워즈의 행복론은 그의 신학에서 중심 역할을 하며, 그의 논문들에서 발전시킨 교리들을 통합시켜준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원죄론, 자유의지론, 천지창조의 목적, 그리고 참된 미덕에 관한 저서들은 인간의 번영에 관한 그의 입장을 견지하고 구체화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즉, 에드워즈의 행복론이 그의 다른 주요 교리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개괄할 것이다.

에드워즈는 『원죄론』 (Original Sin)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셨을 때, 사람 안에 두 가지 원리를 심어놓으셨습니다. 우선 자̇연̇적̇ 이라고 불리는 하̇등̇한̇ 것으로서 순수한 인간의 본성의 원리들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본성에 속한 자연적인 욕구와 정념들을 수반한 자기사랑으로서, 그 속에서 자기의 자유와 명예, 그리고 즐거움에 대한 사랑이 실천됩니다. 이것들만 따로 떼어놓으면, 성경이 그것들을 가리켜 종종 육̇신̇ (flesh)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들 외에 영적이고, 거룩하고 신적인 고̇등̇한̇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신적인 사랑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인간의 의와 참된 거룩함이 포함됩니다. 이것들을 가리켜 성경은 신̇성̇한̇ 성̇품̇ (divine nature)이라고 부릅니다.

에드워즈가 성령에 의해 가능한 ‘고등한 원리들’이라고 부른 것은, 마음속에서 “왕좌를 차지”하고 “지배력을 행사”하여 열등한 원리들을 다스리도록 주어졌다. 그 원리들을 제대로 다스렸다면, 아담의 정념은 “화평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바르게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첫 조상의 ‘정동’은 올바로 맞추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려 그의 저주 아래 떨어진 순간, 이 고등 원리들이 그의 마음을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 순간 그를 떠나셨고, 이 원리들이 의존하고 있던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신적인 거주자이셨던 성령께서 그 집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반역자가 되고, … 따라서 사람이 어둠의 상태에 남겨지게 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와 교제하시고 그 속에 … 거하시는 것이 결코 옳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과 법에도 …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사랑과 자연적인 욕구 등의 하등 원리들만 홀로 남아 전적으로 마음의 주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을 빼앗긴 아담의 정념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아담의 자연적인 욕구가 그를 집어삼켰다. 인간은 부패하게 되었다. 아담의 후손도 똑같이 혼란스러운 윤리적 상태의 세상에 들어갔다. 그들은 한 때 그들이 즐기던 초자연적인 도움을 빼앗긴 채 태어났다. 거듭나지 않는 한, 그리고 거듭날 때까지, 그들은 성령이 없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아프게 남겨놓으신 공허함을 하등한 것들로 채우려고 선택한다. 그 하등한 것들은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타락 이후에 잘못된 ‘정동’을 가진 자들에 의해 부패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그들은 번영할 수 없으며, 심지어 번영을 원하지도 않으며,지속적인 기쁨을 얻지도 못한다.

에드워즈는 존재론적 실재론자였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실제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시간과 공간과 문화를 넘어) 보편적으로 인간의 존재와 연합한다고 생각했다. 원죄에 관한 그의 관점에서 보면, 아담은 인류의 실제적인 머리로서 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연합되어 있는 것이지, 언약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멀리 떨어져 있는 인류의 대표 정도가 아니었다. 우리는 아담과 함께 에덴에 있었다. 물론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그러하다. 마치 상수리 안에 참나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아담의 타락에 참여했으며, 따라서 그 타락에 영향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기분 내키는대로 우리를 죄 있다고 여기지 않으신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비난 받을 만 하다. 인간의 본성은 부패하며, 우리는 모두 우리 형제들을 지키는 자들이다. 우리 모두는 아담과 하와에게서 처음 나타난 이후 인간의 본성을 부패하게 한 악한 성향 때문에 죄책이 있다. 우리는 동산에서 의도적으로 주님께 반역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실 때까지 계속해서 반역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서, 자연적 또는 물리적 강요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기뻐하는 대로 행한다. 따라서 우리는 선 대신 악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의 의지는 오도되고, 타락과 성령을 거두어 가심에 영향을 받으며, 죄에 치우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간적인 자기사랑의 “하등원리”에 근거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선택한다. 물론 이것은 비극이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느끼는 인간의 행복에 대한 왜곡된 감각에 대해 오직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에드워즈의 두 논문, 『천지창조의 목적』과 『참된 미덕의 본질』은 원죄와 자유의지에 관한 작품으로서, 여기에서 그는 타락 이후 아무도 참된 미덕의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원리들”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즉, 타락 이후에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고 참된 행복을 즐기는데 필요한 습관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처지에 있다. 모든 사람은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자̇ 유̇ 를 가지고 태어난다. 모든 사람은 양심과 자기사랑과 인간적인 긍휼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갈망하는 등의 자연적인 원리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타락 시에 잃어버린 참된 박애의 더 높은 윤리적 원리들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공의롭고 건전한 시민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경건함과 거룩함과 전반적인 선한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회심이 반드시 요구된다. 참된 미덕을 성취하고 유다이모니아를 얻기를 소망한다면,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을 인도해 주실 성령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미 앞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에 대한 가장 유명한 신학체계를 그의 논문, 『천지창조의 목적』에서 세워놓았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창조 목적”을 다루면서,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창조하셨다고 주장하였다. 에드워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 안에 있는 성향, 곧 그분의 무한한 충만하심을 발산하고자 하시는 그의 고유한 속성이 바로 동기가 되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의존하여 성공을 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기쁨”은, 절대적인 능력으로 행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행동 외에는 아무 것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조물들은 미덕의 삶 속에서 그의 영광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림으로써 그 영광을 확대시키는 데에 참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 없이 이것을 할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의 자연적인 욕구를 재조정하시고 우리를 도우셔서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우리 마음의 공허함을 하나님 자신으로 채워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사는 삶에서 벗어나고, 우리 삶에서 가장 고상한 형태의 인간의 미덕을 거부하게된다. 자연적인 원리들은 하등한 종류의 미덕을 낳을 수 있다. 그 원리들은 얼핏 보기에 참된 미덕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윤리적인 열매는 그 중심이 썩어 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계획하신 행복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에드워즈는 그의 유명한 논문,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참된 미덕과 그와 유사한 많은 것들 사이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미덕인 것들과 단지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관점에서 미덕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있습니다.” 참된 미덕은 “가장 본질적으로 보편존재(Being in general)에 대한 호의에 있습니다. 또는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참된 미덕은 보편존재에 대한 마음의 동의와 경향과 연합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편적인 선한 의지 안에서 즉각적으로 행사되는 성향 말입니다.” 보편존재는 최고의 존재이신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신 전 존재 체계 모두를 가리킨다. 참으로 미덕이 있는 사람은 그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가족들에 대한 호의, 그들이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한 호의, 그리고 자기에게 무언가를 주는 사람들에 대한 호의를 보인다. 그러나 참으로 미덕이 있는 사람은 절대적인 호의를 보인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을 섬긴다는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의 “사심 없는 호의”는 사실 자기희생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호의를 베풀 때 가장 큰 기쁨을 얻는다. 그의 자기사랑은 보편존재를 섬기는 데서 만족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구 나누어 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해 주권적으로 지배를 받는 참으로 미덕 있는 마음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이것을 그의 가장 높고 지배적이고 궁극적인 목표로 삼습니다.” 그는 사람이 창조된 목적인 신적인 기쁨과 행복감을 경험하고 나누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한다.


결론

에드워즈의 모든 주요 저서들에서, 성령은 세상에서 번영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 성령론적 주제는 에드워즈의 삶과 사역에서 중요한 특징이라고 불릴 수 있다. 에드워즈는 계몽주의 시대에 국가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 받은 복음주의 목사였다. 에드워즈는 자기만족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자유사상가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실재하시고 실제로 활동하신다는 점과,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과 기쁨을 다른 피조물과 나누시기를 원하셨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위해 성령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졌다.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 “회심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회심입니다. 따라서 회심한 사람들은 행복하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장 불행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령에 반응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삶을 드린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죽음을 더 잘 준비할 수 있으며, 영원히 행복하고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과 같은 것”도 있다고 에드워즈는 가장 사랑 받는 그의 설교 중에서 설교하였다. 그 빛은 성령에 의해 영혼에 즉시 전달된다. 그 빛이 지금 여러분에게도 전달될 수 있다. 그 빛은 여러분에게 신적인 진리를 보여줄 수 있다. 그 빛은 여러분의 의지를 자기 파괴적인 성향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다. 그 빛은 여러분을 참으로 만족시켜주는 것들 안에서 성취감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 빛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며, 여러분의 일상을 역동적이며 중요하게, 그리고 사랑과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에드워즈의 시대나 우리 시대에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는가?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겠는가? 에드워즈가 옳았다. 인간의 행복에 더 나은 길은 없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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