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 칼럼[오늘의 말씀] 2017년 01월 23일

변화산의 기도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오늘 다루고 있는 이 장면은 그 변화산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러 변화산으로 올라 간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다가 변화가 되니까 그 산이 변화산이 되었습니까? 후자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이것을 다루면서 우리의 기도와 인격 우리의 영적인 수준의 변화에 대해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변하는 장소, 일정한 시간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갔는데 이 산이 어느 산이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변화산이라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장소는 일정하지가 않았습니다. 주님 자신의 인생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처음 오시면서부터 공생애를 사셨던 그 삶의 방식이 늘 돌아다니는 삶이었습니다. 늘 여기저기를 다니시고 이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고 저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이러한 삶을 예수님께서 쭉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놓고 한 장소에서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 시간만은 일정했습니다.

대체로 보면은 한낮에는 거의 기도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한낮에는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열심히 섬기시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시는 이러한 실제적인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깊은 밤에도 이런 일들을 하셨지만 대개 낮에 이런 일들을 많이 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개 새벽미명에 기도했다는 기록이 몇 번 나오고 깊은 밤에 기도했다는 기록도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장소는 일정하지가 않아요. 어느 곳에서는 감람산, 어느 곳에서는 빈 들 , 그렇게 여러 곳에서 상황 닿는 곳마다 택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주님에게 있어서 기도하는 장소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찾고자 원했습니다. 고독한 장소, 남이 찾아오지 않는 장소를 찾기 원하셨습니다. 그런 조건이 만족되면 어디서든지 예수님은 기도하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때로는 빈들에서, 때로는 산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찾으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먼저 환경과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별된 장소가 필요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장소가 특별히 없다는 것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늘 출장 다니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도저히 교회에서 기도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어디든지 출장지에 도착해서 며칠을 묵든 도착하고 나면 가장 먼저 기도하기 좋은 장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교회를 찾던지 아니면 기도할만한 가장 좋은 장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하는 동안은 그 장소를 기도 장소로 알고 가서 기도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실은 기도할 수 없게 하는 많은 요소 속에서 우리를 지키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느 날 산을 택하셨어요. 아마 이 때에는 더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셨던 것같습니다. 그 산 속에는 보장된 고독이 있습니다. 방해받지 않는 일들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산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전에 중요한 것은 이런 보장된 고독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도 그렇고 장소도 그렇고 보장된 그런 곳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께서도 산을 택하셨습니다. 이렇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자리하시고 나와 더불어 대화하실 수 있는 그 공간을 치워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과 공간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산에 올라가신 시간은 아마도 밤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울 때도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내려왔습니다. 특별한 때에 특별한 장소를 택해서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이 기도의 시간은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주님은 엘리야와 모세와 만나서 틀림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구속의 사업에 대하여 의논하셨을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을 위해서 고독이 보장되어있는 산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말이 주는 도전은 바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고독이 보장된 시간과 장소가 우리의 삶 속에 있어야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변화되신 용모

두 번째로 다룰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셔서 용모가 놀랍게 변화되셨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변화되셨다는 이야기죠. 얼굴의 형체가 변화된 것이 아니라, 그 형체에서 풍기는 인상과 이미지가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모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왔을 때 용모가 변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것은 용모가 변화되고 싶어서 올라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올라간 것은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예수님도 역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가신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이미 죽어야 할 것이 임박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살아나야지 너희들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고난에 대한 말씀을 생생하게 직접적으로 일러주시고 난 후였습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하기 위해서 마지막 시시각각으로 당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십자가의 고난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누구도 바라보지 못하는 그 십자가의 고난의 그 그림자와 그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을 얻게될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과 기쁨을 위해서 자신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에 순종시킴으로 말미암아 구약 이래로 줄기차게 계속되어오던 인류구속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메시지, 아브라함도 그토록 사모하면서 바랬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버리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때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는 산에 올라 가셔서 기도하시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다른 사심은 없었습니다. 무슨 위대한 영적인 체험을 하고 싶다든지 심지어는 권능을 한손에 받아야 하겠다던지 혹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겠다든지 하는 그런 야망이 그로 하여금 산에 올라가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께 주님을 뜻을 이루어 달라고 간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해서 그 말씀이 자기를 향해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고 혹시라도 마지막 한순간에 인간적인 불순종이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의 대화를 미루어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난 후에 홀로 남게 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한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네가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느니라. 네가 돌이킨 이후에는 형제들을 굳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십자가의 고난을 지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의 고난을 지고 죽으신 이후에 홀로 남게 될 제자들이 견고한 믿음 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사역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사역의 토대 위에서 아버지께서 세우시고자 했던 그 교회들을 세워가는 일들을 원하셨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 곳에서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기도하실 때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올라가셔서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눈과 같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도하실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한 그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소의 기도 생활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다 하자 어느 한 순간에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눈같이 희어져서 광채가 나는 영적인 체험이 주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는 기도 없이도 영적인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죄인들을 사랑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 속에서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쩍새가 다 울고 난 후에 국화꽃이 피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자신을 다 드려서 기도하고 나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용모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변화가 기도를 통해서 일어남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바가 정말 참으로 깨달은 바라면 그 깨달은 바는 우리로 기도하게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것이 우리로 기도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야고보서에 나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울을 보고 더럽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가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감동시킨 그 감동이 참된 감동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움직인 것이 참으로 우리를 움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말씀을 알았다는 그 사실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알았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 깊이 들어온 것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 속에 느껴지고 성령을 통해서 그것이 우리의 삶과 인격을 움직여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으로 천박한 사람들 대부분은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할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기도한다는 것이 깊이 기도한다는 것과 똑같은 말은 아닙니다. 더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기를 부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큰소리치기 잘하고 장담 잘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나 스스로 결단하고 결정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깨닫는 사람들은 늘 담대해도 성령 안에서 담대하고 자랑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고 견고해도 복음 안에서 견고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를 받으러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 것인데 기도하다가 이처럼 신령한 모습으로 변화된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왜 일어나는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기도를 통해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깨달음이 참다운 깨달음이라면 그것은 머리에서 그치치 않습니다. 그것이 참다운 깨달음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밑에까지 내려가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충격 받았다고 하는 것은 못 볼 것을 보거나, 아니면 기대치 못한 것들을 들었거나, 아니면 맡을 수 없는 냄새를 맡았거나, 셋 중 하나입니다. 머리하고 관계되지 않은 충격은 없어요. 그런데 쳐다봤는데 갑자기 쳐다보자마자 어디가 두근거립니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떨리기 시작해요. 그것은 보고 그것이 나와 관계가 있으니까 봤을 뿐만 아니라 그 본 것이 마음 깊은 곳에 큰 파장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차원적인 영적인 유희를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많이 들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에 올라가신 것은 철저히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의 기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깊이깊이 기도 속으로 들어가니까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오직 하나님만 보이는 거지요. 그리고 그 기도가 깊어지게 되니까 신적인 영향이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외모 속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최고의 단계는 언어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신적인 영향이 우리에게 비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거룩한 성품의 빛, 영광의 빛이 비췸으로 말미암아 그 영향을 육체를 입은 우리들이 받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거룩해지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고 주님처럼 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이 변화산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기도 안 할 때는 다 내가 잘한 것 같은데 기도하면 성령이 우리의 잘못을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내가 얼마나 모난 사람이고 못됐는지를 깨닫는 것도 눈뜨고 있을 때 깨닫는 것이 아니라, 눈감고 있을 때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기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눈뜨고서 기도의 영의 사로잡혀있지 않을 때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사실들을 성령은 우리에게 인정하도록 촉구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는 우리가 다 잘난 것같이 생각되는데 깊이 기도할 때는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기도만 열심히 하고 인격은 엉망인 사람들은 삶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생활 습관에 대해서 회의를 느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기도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우리는 이런 인격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도는 우리를 경건을 넘어서 거룩한 사람을 만들어 줍니다. 말씀을 바로 깨닫고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환경적 도구의 한계

흔히 환경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듬으신다고 하시는데 그렇게 다듬으시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환경에 의해서 하나님이 나를 많이 다듬으셨다고 하는데 환경만 가지고는 안돼요. 하나님께서 환경으로 우리를 다듬으신다고 하면, 환난이 닥치고 시련이 닥치면은 점점 환난과 시련을 많이 겪으면서 신앙적으로 세련되고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를 않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환난을 겪은 사람들은 환난이 많이 닥친 다음 세월이 흘러가면 그 환난으로 말미암아서 마치 야곱처럼 인격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내 나그네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오만은 조상의 년수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그렇게 바로를 축복하면서 기도하는 야곱의 모습 속에서 이전에 있던 탐심 같은 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이미 그런 것은 초월했어요. 환난과 풍파를 수없이 겪으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환난과 풍파만 당하면 사람이 더 강팍해지고 모질어지고 잔인해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시집살이하고 남편으로부터 구박받고 고생하면서 한이 맺힌 사람들은 결국 고생을 많이 해서 인격이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한이 맺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멍이 들어서 무엇이든지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뭐든지 사물을 삐딱하게 쳐다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정신적인 불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환경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다듬으셔도 환경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환경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환경이 아무리 풍파가 일어나도 거기서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환난을 많이 당하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가슴에 한이 맺힌 것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자신은 자기의 가슴을 움켜쥐고 스스로 불쌍히 여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 쓸데없는 인간의 고집과 완악함과 패역함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보십시오. 환경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환난과 풍파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당신을 찾고 부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야곱을 다듬은 것은 시련이 아니라 야곱을 다듬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야곱은 철저히 다듬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기도를 얼마하지 않던 사람이 말년에 가서는 틈나는 대로 기도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만나도 기도하고, 자식들이 모여도 기도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그의 삶이 하나님과의 기도 속에서 바뀐 것입니다.

기도 속에는 그런 놀라운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질이 급한 사람을 유하게 만들어 주고 결단력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할 때에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분명한 성격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태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근면하게 하고, 옳고 그른 것들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분명한 양심의 각성을 심어주는 것도 기도가 하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깊은 기도는 우리에게 온유한 마음과 탁월한 영적인 분별력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정말 변화되는 것입니다. 앉아서 같이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깊이 기도하며 사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영적인 변화에 대한 좋은 얘기를 많이 들어도 결국은 그 말씀을 붙들고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그저 박수치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보다 높은 영적인 삶, 보다 완전한 신앙 생활, 보다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 이러한 것들을 사모한다면 듣기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영성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배울 수 있는 기도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시는데 누구를 데리고 가셨습니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기도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 속에 나타나는 참된 경험은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받은 사람만 알고, 주신 하나님만 아시고, 그리고 받아본 사람끼리만 얘기가 통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를 고친 것은 베드로와 요한 안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시간이 되어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 갈 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이 자리에서 이들은 졸고 있었지만은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들을 가르치는 것만큼 기도로 가르치시기 위해서 힘을 쓰셨습니다. 기도를 배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를 믿게 된 그 순간부터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교장이요, 선생으로 계시는 기도의 학교에 입학한 것입니다. 그 학교에 입학해서 우리는 기도의 초보에서부터 시작해서 기도의 깊은 경지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엔 영혼을 움직이고 우리에게 불과 같이 달려드는 어둠의 세력들의 이빨을 꺾으며, 달려드는 죽음의 파도를 잔잔케 하고 심지어는 엘리야와 같이 하늘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능의 열쇠를 손에 넣기까지 우리는 그 기도의 학교에서 배우고 또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책 한 권이나 말로 가르쳐주시지 아니하시고 몸소 기도하시는 그 현장에 데리고 가셔서 기도를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그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기도하는 현장 속에서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학교 속에서 배우는 그 교훈, 수없이 흩어진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관한 교훈과 주옥과 같은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우리는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을 다하여서 그분처럼 그렇게 기도하기를 소원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훈련시켜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변화산에서 기도하시다 자신이 변화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렇게 인격과 영적인 삶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힘과 능력을 여러분의 손에 주시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 경건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