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 칼럼[오늘의 말씀] 2017년 05월 29일

통성기도는 부흥의 비결인가?

능력의 사람들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 선지자였습니다. 능력에 있어서 선지자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뛰어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북왕국 오므리왕가의 아합왕 시대에 사역하던 인물입니다. 아합의 시대는 우상숭배가 창궐하던 시기였습니다. 아합의 아내는 시돈왕 중 엣 바알이라고 하는 사람의 딸, 이세벨이었습니다.

시돈은 지중해와 바로 통하는 항구 도시입니다. 그 항구도시를 통하여 지중해로부터 많은 문물이 시돈을 통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들어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해양 민족 출신으로서 바알을 아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말하자면 이세벨은 헌신된 바알 종교의 선교사로서 이스라엘 땅에 시집 온 것입니다. 아합의 불신앙과 이세벨의 이교 신앙이 합하여져 이스라엘 역사는 가장 악하고 어두운 배교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때에 아주 걸출한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불신앙과 죄악의 어두움이 깊은 때에는, 하나님께서 더 강력한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와 사역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성정이 같은 사람들

오늘 본문이 그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그 시대 한복판에서 그렇게 용감하게 투쟁하며 승리할 수 있었는지의 비결을 그의 기도 생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17절)” 여기서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 위대한 선지자조차 하루 종일 일과에 시달리고 나면 피곤하고 그러한 피곤에 의하여 언제든지 기도 생활이 방해받을 수 있는 연약함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육신의 힘에 있어서도 그러했고 마음에 있어서도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생애를 살펴 볼 때 우리와 자칫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외쳤던 불꽃과 같은 메시지와 초인적인 헌신의 삶에만 시선을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강하였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성정을 가진 인생들일 뿐이었습니다. 걸출한 선지자들이지만 예레미야나 에스겔이나 걸출한 선지자들의 기록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자주 영적인 침체에 빠지고 낙담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광의 선지자였던 이사야나 믿음의 선지자 하박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위대한 선지자였음에는 틀림 없지만, 순간순간 우리와 같이 성정을 가진 사람들임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주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던 연약함에 쉽게 굴복했었습니다. 쉽게 지치고 낙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붙들고 계신 강하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강하신 하나님과 동행한 것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거론하고 있는 엘리야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고 신령한 것으로 말하자면 하늘의 불을 땅으로 불러 내린 사람이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칼로 몸을 그으면서도 일으킬 수 없었던 역사를 갈멜산에서 끌어 내렸던 사람이 아닙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물이 흐르는 도랑을 핥고 제단에 쌓은 장작들을 불태울 때 그 옆에 서 있는 선지자 엘리야는 분명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이 사람이 우리와 꼭 같은 연약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때 갈멜산에서 하늘의 불을 불러 내린 그 사람이 얼마 후에는 그린 시냇가에 주저앉아서 하나님 앞에 불평하며 허기짐과 목마름 속에 주저앉은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신령한 체험을 했지만 인간의 성정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하여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엘리야가 하늘에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비가 오도록 다시 기도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벌하고 다시 축복한 사람이었지만, 성경은 그를 단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농경 사회와 우상

가나안 땅은 농경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바알은 그러한 농경 사회의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는 그런 농경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지배와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신이 비를 좌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풍년은 비의 양, 그리고 강우 시기와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파종하기 직전에 이른 비가 한 번 오고 추수하기 전에 늦은 비가 와야 온전히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번영과 행복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과 바알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비가 안 오고 농사가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보면 바알이 도움이 안 된다 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17절)” 엘리야 선지자가 간절히 기도했더니 비가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가 간절히 엘리야와 같이 기도하면 기상에 이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마음을 반영한 기도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엘리야가 간절히 드린 기도 그것은 단지 간절했기 때문에만 응답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비를 그치신 것은 선지자 엘리야의 기도 제목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의 소원을 반영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각한 영적 타락과 우상 숭배의 죄악상 가운데서 하늘의 비를 그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의 공의를 간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읽은 기도 내용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의 기도는 우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기도였습니다.

때로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이 도무지 성경적이지 않고, 열심은 있으나 무엇인가 많이 신앙의 핵심을 빗나가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읽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기도가 더 능력 있고 응답 받기에 합당한 것은 먼저 그의 관심이 하나님께 있어 기도 제목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엘리야가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새로 나온 좋은 승용차 한 대를 제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면 그 기도도 하나님이 이렇게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하셨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간절한가

간절한 기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간절해졌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저는 주위에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렇게 간절히 드리는 기도를 자신의 그릇된 확신과 잘못된 신앙관을 강화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무조건 하나님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같이 생각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기도에 대한 전적인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이야 어떻든 쎄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앞에 항복하실 수밖에 없다는 그러한 기도에 대한 생각은 미신적인 망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로 밀어 붙인다”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그것도 정신없는 사람들의 망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간절히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전제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러분들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까요? 하나님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원하는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이어서 여러분들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도록 그렇게 하나님과 대면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보고 계시는지 그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조국과 교회를 위하여 교회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먼저 민족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부은바 되어 지지 아니하면 우리의 기도는 단지 형식과 의무감에 매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중보기도라기 보다는 의무적인 리포트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그 때 우리는 기도에 커다란 추진력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간절하게 됩니다. 마치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가 강한 불꽃을 뿜으며 하늘을 차고 오르는 것같이 그렇게 강력한 기도의 추진력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내게 무엇을 기도하기를 원하시는가 무엇이 하나님께서 가장 다급하게 생각하시는 기도의 제목이며 그것을 기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러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비를 그치게 해 달라는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의 반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만이 살아계시는 이스라엘의 여호와이심을 그 백성들로 알게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도시키시고 싶어 하셨던 기도제목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기 원하시는 바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도전입니다.

깨달아야 기도 한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합한 기도제목을 발견하여 그 기도에 헌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주위에서 그 사람이 기도를 좀 적게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 헌신했더라면 훨씬 더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았을 사람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기도와 금식이 그들을 더욱 잘못된 것으로, 굳어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도 자체가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기도했다고 하는 자기의, 간절히 기도한 것 자체를 업적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이 그들에게 그릇된 확신을 부채질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이 자신에게 깨닫게 해 주시고자 하는 바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마음의 감화와 감동은 반드시 깨닫는 것을 통해서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읽으십시오. 주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삶과 신앙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까요? 그것에 대하여 먼저 관심을 가져야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제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이러한 통찰 없이 무조건 간절한 기도가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미신적인 편견입니다.

오늘 엘리야 선지자가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하늘의 비를 그치게 하였지만, 그는 단지 능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깨어있다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로 두 번째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엘리야의 기도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간절한 기도의 태도였습니다. 이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바른 목표와 바른 동기에 기초해서 기도하면 되지 왜 그 자세가 간절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오늘 성경은 단지 이 사람이 기도했기 때문에 비가 안 왔다고 기록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목으로 기도한다 할지라도 사무적인 태도로 건성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기도 응답의 축복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기도해서 응답을 받는 것이 목표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에게 우리의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목표가 아니십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가 기도하는 바를 응답으로 받아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바꾸시고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기도를 통해서 사람을 바꾸심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지 아니하고는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바꾸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기대치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J. Calvin)은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가? 그것은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렇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그 기도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게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고 전폭적으로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만듦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정결케 합니다.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고 지내다가 길이 잘 열리게 되면 그들은 한결 같이 재수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의뢰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 주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통하여 환경을 바꾸려고 덤볐던 사람들이 간절한 기도 속에서 자신이 바뀌는 것을 흔히 경험합니다. 많이 기도한다고 말하면서 천박한 인격과 경박한 기도의 태도를 계속 견지하는 사람들은 참다운 기도의 세계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열망하는 가운데 변화를 경험합니다.

일곱 번의 기도

우리는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했다는 사실을 보도 받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왕상 18:42 –45)

하나님께서 다시 하늘을 열고 비를 내리실 때에 그는 일곱 번을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일곱 번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회수 자체가 그의 집요한 기도 자세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선지자의 다급함과 간절함의 표시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늘을 열고 닫는 기도를 할 때 불붙는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혹은 이후에 간절한 기도에 있어서 자기가 예화로 등장할 것을 예견하면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간절히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목표가 올바르고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합했다고 하더라도 간절함이 없는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으로부터 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것은 대부분 그 기도의 간절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 그 열렬한 기도의 영이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응답해 주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신앙이 자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그들이 열렬한 마음이 되고 열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호소할 때에 그들은 결코 낙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간절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지 않았어도 그는 바뀌지 않는 상황 뒤에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수시로 듣습니다.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헌신된 기도로 부르짖는 사람들만이 느끼는 영음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영적인 음성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말입니다.

밤새도록 우는 산

여러분들은 산사태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은 산림이 우거져서 쉽게 커다란 산사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종 커다란 산사태를 보게 되는데 산사태가 나기 전에는 밤새도록 산이 웁니다. 커다란 소리가 나면서 산이 무너지기 전에 밤새도록 “우르릉 우르릉”하며 산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무너지는 것이 없는데도 밤새도록 울다가 어느 시점에 엄청난 사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도 유사합니다. 어느 날 예기치 못하게 바뀐 상황이 응답으로 오기 전에 긴 시간 동안 아무런 변화 없이 헌신적이고 간절하게 기도만 해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상황이 변하지 않았어도 계속해서 드리는 그 간절한 기도는 그 상황을 무너지도록 울립니다. 완전히 무너져서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기도의 능력은 그 상황의 내부 속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간절한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들은 그러한 영적인 통찰을 가지고 자기가 기도하는 상황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변화를 읽어낼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단지 상황의 겉모습만 바라보며 좌절하거나 근거 없는 낙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간절한 기도의 영이 유지되어야만 기도하면서도 가운데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성 기도는 부흥의 비결인가?

어느 교회성장학자가 성장하는 교회의 공통적인 요인을 조사하였는데 그것은 통성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즉 성장하는 모든 교회는 통성으로 기도하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결론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통성기도 그 자체에 무슨 매력이 있는 것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르짖으면서도 간절하지 않는 기도는 얼마든지 있고 간절하면서도 소리 내지 않는 기도가 때로는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면의 모습이 아니라 기도 자체를 움직이고 있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간절함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모든 기도가 하늘의 능력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린 모든 기도가 간절하지 않은 기도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에 응답하시고 능력을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습관처럼 되어있는 “주여!”를 세 번 부르짖는 모습이나 마음이 실리지 않은 통성 기도의 습관화 같은 것은 교회로 하여금 영적인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칫하면 기도에 있어서 외식에 흐르게 하는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의 가슴은 첫 번째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모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모으고 마음을 집중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간절한 기도의 영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떨어지기까지 기도하신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신 그 기도가 통성기도였는지 묵상기도였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을 동반한 자신의 온 영혼을 실은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실 때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22:41). 잡히시던 날 밤에 하나님께 드렸던 예수님의 기도는 힘을 다 한 기도였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힘을 다한, 육체의 노고를 아끼지 아니하신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 영혼의 시선을 고정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영을 유지하려면...

그러므로 우리는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영을 유지하기 위하여 범사에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삶이 습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복잡한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의 거룩한 성품을 묵상할 때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는 영적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영적인 순발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순발력은 우리로 하여금 짧은 시간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도하게 만들어 주고 바울이, 임재를 느끼며 성령 안에서 기도하던 기도의 세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소리를 내고 소리를 내지 않고 하는 것은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가장 잘 주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도 무엇을 기도했는지조차 잊고 살아가는 것은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스스로 기도하고도 그 기도에 결과가 어떻게 응답되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거의 무관심하게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입니까?

오늘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능력에 있어서 우리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인 탁월함이 기도에 있어서 덜 간절하게 기도하도 놀라운 은혜를 받게 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그의 기도의 특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열렬하고 간절한 삶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삶을 능가하는 기도가 없고 기도를 능가하는 삶도 없습니다.

간절하게 살아야지...

언젠가 수요예배 설교를 마치고 내려온 저에게 어느 젊은이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주 앉은 자리에서 저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왜 그런지 기도가 열렬하고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제가 되물었습니다. “열렬히 사십니까?” 간단한 되물음 앞에 그 청년은 한참동안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열렬히 살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열렬한 기도를 기대하겠으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원을 품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감정놀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이 만약에 간절히 기도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즉시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 나태와 안일에 빠져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간절하고 열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간절하고 열심히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의 영을 유지하면서 범사에 고정된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열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 헌신된 사람이... 결국 우리는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헌신을 가져오는 수단인 동시에 또한 헌신의 모체이기도 합니다.

기도에 헌신된 사람은 삶에 있어서도 헌신된 사람이고 사역에 있어서 헌신의 정신을 보여주는 사람은 기도에 있어서도 헌신된 사람입니다.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 나누어질 수 없듯이 연합되어 있듯이 기도와 헌신은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삶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사는 헌신 없이 열렬한 기도가 있을 수 없고 간절한 기도 없이 참된 헌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거룩하게 구별된 헌신의 상태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일에 간절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섬김의 직업화 현상을 예방하는 길이며 간절한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강한 기도의 사람들이 모두 간절한 기도의 세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짧게 살아도 많이 사는 길

기도의 사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가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에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린 기록들을 읽어 보십시오. 그는 자주 자신의 기도를 씨름에 비교했습니다.

그의 일생은 기도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기도하기에 유익한 시간으로 살았습니다. 설교하기 전에 헌신적인 기도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설교한 후에는 자신이 그 설교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에 자신을 바쳤고 자신의 생일을 종종 금식하기 위한 날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교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쏟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도에 축복하심으로 다른 사람보다 반도 못되는 수를 누리고 죽었지만 자신보다 두 배나 더 오래 산 사람보다 훨씬 위대한 일들을 이루고 죽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죽음으로 끝났지만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은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 날에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전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마귀와 환경과 자신의 도전이 너무 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 밖에 이 간절한 기도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단은 놀다가도 가장 연약한 신자가 무릎을 꿇을 때 그 사람을 주목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방해를 능가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간절히 기도하려는 강인한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기도를 씨름에 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씨름은 고대의 로마 시대의 시험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씨름은 신사적인 경기가 아니라 두 사람을 경기장 속에 밀어 넣고 둘 중 한 사람이 상대방을 쳐 죽일 때까지 계속하는 씨름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안일함이나 태만함도 볼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열렬하고 전투적인 진지함이 있을 뿐입니다.

기도의 위인들이 도달했던 그 기도 그것은 바로 이러한 간절함 끝에 도달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달콤함을 경험하며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통하여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기쁨은 이 간절함이라고 하는 기도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쓰디쓴 싸움 끝에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번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안타까워하며 더 간절하고 열렬한 부르짖음으로 영적인 교제 속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하여야 합니다. 성경 속에는 가끔 한 번의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내린 기도 응답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던 영적인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그 위대한 일들은 짧은 기도로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평소에 아주 긴 시간 동안을 간절한 기도 속에서의 삶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두 번째 받아야 되는 도전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기도 속에서 맛보기 위해서는 간절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맛보는 참다운 거절감으로도 쉽게 낙심하고 기도의 자세를 풀어버리는 사람들은 결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기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육개월 정도 안 왔는데도 농수산부 직원들이 돼지 머리를 삶아서 산꼭대기에 가서 고사를 지냅니다. 이 개명한 시대에도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물며 아합의 시대에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안 오고 땅을 파도 샘이 솟지 않고 가축들이 들판에서 기갈에 헤매다 쓰러져 죽어가고 곡식이 누렇게 타들어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 안했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오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비가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한 사람은 엘리야 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하늘을 열어 주시도록 부르짖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그 많은 사람들의 기도는 관심조차 갖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한 사람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다시 비가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다시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할 때까지 닫힌 하늘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의로운 삶의 능력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약5:16-17).

요점은 이것입니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그의 의로운 삶과 연결시키고 습니다. 엘리야의 삶은 의로운 삶이었습니다. 이 땅에 비나 내려서 사람들의 기근이나 해결해 주려고 온 선지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온 삶으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지 말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또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도 이러한 의를 추구한 엘리야의 삶의 한 반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와 삶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기도의 능력이 그의 평소에 함께 하였던 이유였습니다.

오늘날은 너무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번영과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에 대해서 수많은 말을 가진 말꾼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의 변화와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변혁된 삶에 대해 아무런 헌신도 없이 일주일 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다가 교회 와서 주일 한 번 예배나 드리고 도망치듯이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조국 교회의 갱신을 위하여 기도할 리도 없거니와 그들의 기도가 간절할 리가 없습니다. 설령 그들이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위대한 일들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기도는 삶을 위하여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웁니까? 교회의 참된 부흥과 변화를 위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각성과 하나님의 교회가 어두운 역사에서 불꽃처럼 나타나는 영광스러운 영적인 부흥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고 자신의 모든 삶의 구심점이 그 거룩한 목표에 고정되어 있는 사람 마음이 언제나 거기에 붙잡혀 있고 그것을 위하여 살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부름받은 사람 그러한 사람들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헌신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의 불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선교를 위하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도 복음을 전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선교와 복음 전파를 위한 열렬한 기도의 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수고하는 영혼들이 자신이 외치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받는 역사를 경험하는 삶을 간절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냉담한 사람들의 마음에 구령의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가정의 구원을 위해서 늘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정말 그 가족의 영혼들의 미래에 대해 긴박감을 느끼고 그 영혼들이 처한 상태에 대한 염려와 그 가족들을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그 영혼들을 위하여 금식하고 염려하며 무엇인가 그들의 영혼의 유익을 주기 위하여 수고와 고난의 삶을 살아갈 때 그들은 중보기도 속에서 가족의 이름을 부를 때 목메는 아픔과 슬픔을 간절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동반되고 삶으로 고민하지 않는 기도는 단지 종교적인 놀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절박한 삶, 간절한 기도

간절한 기도는 절박한 삶에서 비롯됩니다. 삶이 안일하고 나태한 사람들 가운데 신령한 영적인 인물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의 증거입니다. 불꽃과 같이 어두운 세상을 지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불꽃같은 치열한 열심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불꽃을 계속 타오르게 하기 위한 기름이 필요합니다. 간절한 기도의 눈물이 불꽃같은 삶에 기름이 되고 그 눈물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성령이 또한 기름이 됩니다. 그리하여 기도를 통하여 간구의 영을 부으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꺼지지 않은 불꽃으로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이 하나님을 떠나고 간절한 고백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간절하고 절박하게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없고 부르짖음도 없는 사람들이 간절하고 성결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았고 그 나라의 실현을 위한 기도의 영을 마음에 불길처럼 소유했던 사람들은 모두 치열한 간절함으로 세상을 누비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일한 삶에도 기도의 영이 깃들까?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간절하게 절박하게 살지 않을 수 없는 삶의 목표를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고 그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절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간절한 삶이 열렬한 기도를 불러왔고 열렬한 기도는 간절한 삶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만약 그렇게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 소망으로 하는 목표가 없다면 그리고 그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들은 살았으나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기도는 살아 있는 성도들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5:5-6)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누리고 탁월한 영적인 축복 속에서 매일을 살았던 사람들은 매순간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박하게 필요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과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이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인지를 언제나 되물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능력 있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안일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절박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열렬한 기도의영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먼저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면 안 되는 절실한 삶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거룩하고 간절한 목표를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에 절실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 있었고, 그러한 기도 속에서 능력을 힘입어 불꽃처럼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마음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애쓴 사람들이 아니면 능력 있는 기도의 영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이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와 우리 자신의 무기력의 근원을 파헤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기도만을 고치고자하는 시도에서 겪는 모든 실패와 무기력을 몰아내고 거룩한 삶과 열렬한 기도의 세계를 동시에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 경건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