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 칼럼[오늘의 말씀] 2017년 11월 21일

하나님을 경험함

들어가는 말

그 동안 조국교회는 거짓된 부흥의 추구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참된 부흥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깊은 체험입니다. 성경이 “진리를 안다”라고 할 때, 그것은 결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진술된 진리와 교훈을 실천에 옮기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를 앎”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진리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스스로 무슨 일을 분주히 하여 공덕을 쌓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소홀히 여기고 행함에 몰두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알고자 할 때 마귀는 우리들로 하여금 진리에 대한 이지적인 지식의 축적이 곧 진리 차제를 아는 것과 동일시 여기는 지식주의의 극단적인 오해에 흐르게 합니다. 오늘날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대다수가 이러한 오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 성경 말씀과 설교를 통하여 진리를 인격적으로 경험하기보다는 독서와 강연과 교육을 통해서 이것들을 지적으로 흡수합니다. 물론 이런 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유케 하는 진리의 능력”(요 8:32) 은 그런 식으로 추구하는 지식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다”의 성경적 의미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가장 오해하는 단어 중 중요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알다(know)”라는 단어입니다. 신약의 어떤 단어의 속뜻을 이해하고자 할 때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그 희랍어의 의미와 함께 반드시 히브리어 구약 본문에서 그에 상응하는 동치어(同値語)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그 단어의 히브리적인 의미를 함께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헬라어에서 “알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들의 히브리어 어원(語源)적 배경은 “야다(???)”입니다. 이것이 명사형으로는 “다아트(???)”가 되어 “지식(知識)”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알다”라는 동사는 구약성경 본문에서 아주 많이 쓰였습니다. 대개 이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인지(認知)하다(사6:9, 창19:33). 지식을 얻다(신9:24), 알다(창29:5), 친해지다(출33:12,17)”등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사유(思惟)속에서 이 “알다”라는 단어는 경험에 의하여 아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많은 용례들이 있지만 동사 “야다(???)”와 명사 “다아트(???)”를 사용한 대표적인 용례 하나씩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지식을 가리키는 말인 명사 “다아트(???)”가 사용된 첫 번째 용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2:9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차2: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원문을 직역하면 “선과 악의 그 지식(知識)의 나무”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식이 어떤 것일까요? 결코 경험을 동반하지 않는 이지적인 동의를 통한 지식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알다”라는 동사 “야다”가 처음 사용된 용례도 창세기에서 나타납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히브리어 원문대로라면 이것은 후일 영어의 “알다(know)"라는 단어에 ”동침하다, 성교(性交)하다“의 의미를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이 ”알매...“(창4:1) 역시 경험을 통한 앎입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도무지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였던 것은 결코 이지의 차원에 머무는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이지에 머무는 지식이 어떻게 인경을 사로잡고, 영혼을 해방시키는 진리의 힘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체험을 동반한 지식

제가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경험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비젼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 좇아가노라”(빌3:10). 이 “알려하여...”(빌3:10)가 과연 오늘날 우리들이 신학공부를 하거나 독서를 하면서 기대하는 그런 지식이었습니까? 바울이 “무엇이든지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여 여기고”(빌3:7),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면서”(빌3:8) 새롭게 알기를 원하여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매진하던 것이 과연 세상의 학문이 습득하는 그런 종류의 종교 지식을 알려 하는 것이었습니까? 위대한 영적인 거성들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적 정보를 잔뜩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칼빈주의의 교리 체계가 가장 성경에 가까운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교리의 체계는 원초적으로 결코 이론에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가 신학 지식을 습득하는 그런 방식을 따라 수립된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성경의 진리를 경험함으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교리의 체계를 세워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은 우리에게 헌신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의 영혼을 깨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열심에 자신을 다 태우도록 내어 드리게 합니다. 도무지 이 땅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로 하여금 그 지식을 갖지 못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치, 하나님과 잃어버린 세상의 영혼들 사이에서 애통하는 제사장으로 서게 합니다.

잘못된 지식주의의 오류

제가 지적하고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 지식의 내용이 그릇된 것일 때만 거짓 지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내용이 아무리 참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도무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의 영광을 위한 열심과 잃어버린 세상의 영혼들에게 대한 거룩한 연민과 우리 자신의 죄악된 모습에 대한 경건한 슬픔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것도 역시 다루는 내용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아는 참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오류는 성경을 대하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말씀을 안다는 사실에 대한 우리들의 접근은 다분히 바리새적이거나 율법사적입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의 오류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말씀을 대해도 삶의 원리가 되지 못하는 지성주의적인 접근입니다. 성경공부와 설교를 통해서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어도 차가운 문자 이상을 만나지 못합니다. 성경에 관해서 남긴 위대한 설교자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내 반석이요, 내 터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기 시작한 지 35년이 지났습니다. 나는 이 성경책을 읽기를 좋아합니다. 이 책은 책이 내포하고 있는 약속의 기록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말 한마다 한마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 섭리와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연합시키고 신자로 하여금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게 하는 성령님께 대한 것입니다. 만일 성경의 문자적인 내용 자체로만 만족한다면 마귀는 교리만을 말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에서 칼빈주의로 넘어가고 충분히 정통적이 되면서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삶을 만족하게 여길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가 조국 교회의 각성과 영광스러운 회복을 바란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그릇된 편견과 오해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날 신학교와 조국교회 중 상당수가 1950-60년대의 비복음적이고 불건전한 체험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또 다른 극단에 치우쳐 차가운 지식주의에 흐르는 오류에 떨어져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다수이고,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회심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대하여 교회가 중요하게 가르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성경과 역사를 상고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러한 극단적인 오류에서 건져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 경건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