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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소개

내가 만난 하나님
들어가는 말
이런 글을 쓸 때마다 망설여지는 것은 자칫하면 성령의 체험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기 보다는 그것을 무슨 자기의 투쟁과 노력을 통해 얻어냈다는 성공수기나 무용담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러한 수기들을 읽으며 감탄하는 것이 읽는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이 될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 비쳐 보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경험에 관한 기록이 때로는 나의 신앙과 영적 생활 전반에 대하여 새로운 평가를 갖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유익이 있으리라 본다.

글을 쓰기 전에, 쓰면서, 그리고 쓰고 나서 무엇인가 나의 체험을 부풀리는 서술은 아닌지를 몇 번씩 되짚으며 진실만을 기록하고자 노력하였다. 여러 가지 체험들이 여러 번 있었으나 내 기억 속에 매우 뚜렷한 인상을 주었거나 부인하기 어려운 지속적인 영향을 준 체험을 네 가지 정도 간추려서 정리하였다.


체험1: 하나님의 사랑
세례를 받고 다섯해 정도 지난 어느 가을이었다.
가정에 매우 절박한 기도제목이 있었고 그때 나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새벽시간에 집근처에 있는 교회에 나아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절박한 기도제목인지라 뜻을 세우고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 일주일 정도 흐른 어느 날이었다. 새벽기도에 왔던 사람들이 돌아가고 예배당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그 새벽 시간에 내 마음은 한없이 가난하여졌다. 의자에서도 내려와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도는 고요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간절한 묵상이었다.

그때 뜨거운 한 덩어리의 불이 마치 유성처럼 강단을 떠나 나를 향해 천천히 날아왔다. 그리고 그때 뜨거운 한 덩어리의 불은 머리에 부어졌다. 그 순간 성령의 품에 안기는 것을 경험하였다. 직감적으로 커다란 은사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가득찼다.

소원이 있다면 주님 닮아 온전해 지는 것이었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 안에 언제까지나 머물고 싶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고 싶었고, 소망이 있다면 나의 모든 것을 당신의 소유 삼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서 한없이 울었다.

아침 햇살이 교회당의 낡은 문에 가득할 때까지 한없이 울었다. 한편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한편으로는 그 앞에 마주할 수 없는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인하여, 그런 나를 넘치도록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후로도 비슷한 경험을 몇 차례 더 가졌지만 그 체험은 언제나 나에게 같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체험2: 영원에의 자각
두번째부터 뚜렷하게 기억나는 체험은 모두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동반한 체험이었다.
여러 번 있었지만-사실 그러한 체험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나의 집필과 설교사역이 불가능했을 것이다-그 중 두 경우만 예를 들어 본다. 언젠가 나를 깊은 각성 속으로 데려간 말씀은 이사야40장이었다. 특별히 그중 세례 요한의 출현을 예고하는 전반부를 다리로 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 가로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6-7).

그때 이 말씀을 보면서, "나"라는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초라하고 허무한 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당시 6개월 동안을 밤마다 침상에서 홀로 울었다. 침묵 가운데 흐르는 끝없는 우주 공간과 두 영원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매우 짧은 순간 잠시 살다가 가도록 보냄을 받은 인생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게 창조된 자신을 바라보며 울었다.

누가 무엇이라고 위로하든지 이전에 내가 알던 모든 인생에 대한 알량한 지식들은 마치 죽음의 전쟁을 눈 앞에 두고 마셨다는 중공군 호주머니의 배갈(毒酒)과 같은 것이었으며, 부끄러운 춤판을 앞두고 댄서들이 맞곤 한다는 마약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삶의 허무함 이상에 대한 각성으로 나를 데려 갔다.

그러나 알고보니 그것은 이미 나만의 고백이 아니었다.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89:47). 나처럼, 하나님을 아는 인식에 있어서 단지 천박할 뿐인 사람과는 비교될 수 없겠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지 풀이라"고 외치도록 분부를 받았을 때에,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허무를 직시하고 나면서부터 인생을 늘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되었다. 한동안 매일 죽음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서가 아니라 사는 동안에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체험3: 조국교회와 기도
어느 날 밤이었다.
몸이 불편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책상 앞에 앉아 신약 성경을 펼쳤다. 시계는 밤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는 전에 읽던 대로 누가복음을 읽어 갔다. 다음 성경 구절을 읽는 동안, 나는 온몸이 감전되는 것 같은 전율을 경험 하였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19:41-48).

반복해서 같은 부분을 읽어 가는 가운데 성경 전체에 걸쳐 흐르고 있는 기도 신학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놓아 우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가 조국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함께 오버랩(overlap)되어 다가왔다.

성경을 읽다가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과 아픔을 인하여 견딜 수 없는 통곡으로 울었다. 한편으로는 거룩하시고 엄위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인하여,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모르는 채 영적인 어두움에 잠겨 있는 조국교회를 인하여...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그 어두움을 교회에 더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조국교회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그 교회들과 함께 준엄한 심판을 당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깨달은 내용들을 몇 자 노트에 적고 나니 시계는 이튿날 아침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러한 체험이 단 한 번은 아니었지만, 그 때 그 말씀 체험이 나로 하여금 평생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어떤 때는 깊은 기도 속에서 살 때도 있었고 기도에 덜 헌신될 때도 있었지만 기도에 대한 기쁜 의무감과 조국교회에 대한 가슴저미는 애정을 갖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나의 소원은 유명한 작가나 설교자가 되기 보다도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로부터 특별히 풍부한 눈물 속에서 섬기게 하셨다. 차를 몰고 거리를 지나다가 문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게 하셨고, 이 도시가 좋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자신의 옥체를 깨뜨려 우리 위해 버리신 그 사랑을 거절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슬픔이 엄습하였다.

아무 것도 나쁜 일 하신 적이 없으신 그분이 우리에게 그토록 생명 주기를 원하시는데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거절하는 당시 나의 설교를 듣던 회중들을 아울러 생각하며 악마의 손에 의하여 심장이 쥐어뜯기는 것 같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온 영혼에 밀려왔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로수 변에 차를 세우고 핸들을 붙든 채 여러 시간 동안 목놓아 울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 이상으로 슬픔을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가슴 시리도록 아팠다. 그 때 나는 순간적으로 이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 아니라 이 시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느꼈다.

세상에는 아무도 위로할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위로받고 싶지도 않았다. 격렬한 아픔 속에서 나는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내 안에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때의 기도는 마치 주님 자신이 내 안에 들어 오셔서 나를 껍질로 사용하시고 당신의 기도를 마치신 후에는 내 안에서 빠져나가시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하였다.

목놓아 울면서 나는 오직 두 가지 소원에 불타게 되었다. 하나는 이렇게 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평생 주님과 함께 나누어 지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어두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만 있다면 내 자신을 다 태워서 산화하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의 울음소리를 들을까 봐 크게 틀어 놓은 카오디오에서는 마침 영화 미션(Mission)의 주제가 중 한 곡인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의 "지상에 임한 하늘 나라(On the earth as it is in heaven)"가 들려 오고 있었다


체험4: 설교의 부흥
어느 해 여름밤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도록 기회를 주셨다. 그 어느 날 설교단에 오르는 순간 나의 마음과 전신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으며, 하나님은 일찌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일을 이 한 편의 설교를 통하여 하실 것이라는 신적인 확신이 나를 사로 잡았다.

그리고 나는 설교가 행해지는 예배 장소 바깥에서 배회하는 모든 사람들을 모두 들어오도록 강권하였다. 그리고 예배 순서를 따라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설교할 본문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우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기록된 누가복음19장41절부터 44절까지의 본문이었다.

설교는 한 시간 남짓 계속되었고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무엇인가 만지면 곧 터질 것 같은 경건한 슬픔이 교회당을 크게 엄습하였다.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에 여기저기서 억제된 흐느낌이, 약간 어두운 교회당을 가득 메웠다. 그들은 마치 한 말씀이라도 더 듣기 위하여 복받치는 설움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장소는 깊은 산중이었고 때는 어두운 밤이었다. 밖에는 폭우와 번개를 동반한 세찬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리의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하여 설교할 때 순간 순간 하늘이 찢어지는 것 같은 광음이 들렸고 먼 산 기슭에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이한 빛이 교회당에 안에 번뜩이면서 설교는 절정을 향하여 치달았다.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성령께서 그같은 자연 환경을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셨다고 생각한다.

설교가 끝나마자 마치 총에 맞은 짐승들의 울부짖음 같은 비통한 부르짖음이 온 교회당 안에 가득하였고, 그 부르짖음이 어찌나 극도에 달했는지 집회하는 예배당의 천정이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울부짖음은 고요한 밤하늘에 이따금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를 타고 골골이 휘돌아 나갔다. 사람들은 설교 중에 극심한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하였다. 영적으로 눌린 자들을 드러내시고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밑도 끝도 없는 깊은 죄의식에 사로 잡혀서, 자신을 가리켜 "죄악 덩어리"라고 고백하였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패배감은 아기 예수에 대한 시므온의 예언을 생각나게 하였다. 이 복된 패배감은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다. 저녁 일곱시 삼십분 경에 시작된 예배는 이튿날 새벽 한 시 반이 되었는데도 끝나지 아니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일어선 채 벽을 붙들고 서서 앉는 것도 잊어버린 채 두시간이 넘도록 폭포수 같은 눈물로 회개하였다.

성령은 집회의 인도자를 밀치시고 스스로 예배를 주관하셨다. 성령은 임하셨고 죄인들의 마음을 녹이셨으며 회개가 끝나자 성령의 각양 은사들은 회중을 뒤덮었다. 그것은 분명히 은혜 체험 이상의 사건이었다. 회중 가운데 괄목할 만한 변화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설교자로서 그들 앞에서 느끼는 나의 느낌은 목석 앞에서 설교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단지 귀를 기울일 뿐 아무런 느낌도 설교를 통하여 기대하지 아니하였다. 후일 그들은 나의 말씀 증거를 설교가 아니라 단지 소리로 느꼈다고 술회하며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후회하였다. 그런 놀라운 일이 있고 난 후에 제일 먼저 달라진 것은 예배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 외에 주일을 통하여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짧으면 한 시간 반, 혹은 길면 약 세 시간 가까이 계속되는 나의 설교를 마음을 다하여 경청하였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모습은 마치 석고상을 깎아 놓은 것 같았다.

회중석에서는, 설교가 시작되어서 끝날 때까지 추호의 미동(微動)도 없었다. 나는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와 같이 그토록 사모하며, 말씀을 듣기 위하여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회중들 앞에 설교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은 한 번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몇 주, 혹은 몇 년씩이나, 아니 지금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도 그 설교를 기억하고 그 말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뛰어난 영적인 축복을 누렸던 탁월한 시기는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 동안은 마치 하늘 나라가 지상에 내려와 있는 것 같았다.

그후 헤아릴 수 없는 날 동안 설교했지만, 같은 일의 일어남을 보지 못하였다. 후일에야 그것이 참된 영적 부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끝 없는 고통과 대적이 둘러 싸고 있었으나 내 인생 어느 때에도 그렇게 행복한 때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잠자는 교회들에 진리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거룩의 회복을 주시도록 설교하고 글을 쓰며 살아간다. 깨달은 교훈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다.

신학공부를 하기 이전에 평신도로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섬길 때부터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 양떼들의 뚜렷한 회심 같은 것을 풍성하게 경험하게 하셨다. 그랬기 때문에 성령의 풍성한 역사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 오면서 자신을 향하여 정리되는 생각이 몇가지 있다.

첫째로 그것은 우선 성령의 체험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과 기쁨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체험하고 나면 순결해 지고 싶고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을 본 받고 싶어지고 더욱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따라서 매우 친밀하고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아니면 영혼이 만족을 얻지 못하는 요구가 생겨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욱 깊은 기도 생활을 사모하게 되었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신비한 영적 체험을 갖는 것은 자신을 견고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위에도 매우 극적이고 신비한 영적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그들의 신앙이 체험의 분량만큼 견고하거나 성결하지 못한 것이 늘 의문이었다.

후일 깨닫게 된 바에 의하면 깊이 있는 영적 체험이 그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는 그 체험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분명한 이해를 통하여 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이 청교도들에게는 신령한 은혜 체험과 불건전한 영적 체험의 시금석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나의 경우 첫 번째 예시한 체험은 그렇지 못했으나 두 번째 이후의 체험은 체험할 때 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일관된 정신을 이해하는 데 말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

즉 그러한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된 그 성경 본문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 모호하기만 하였던 성경의 진리들이 조목조목 연결을 이루며 커다란 강을 이루면서 흘러가는 "성경 전체의 맥"을 향하여 개안(開眼)을 주었다.

후일 성령의 체험이 가져다 주는 중요한 효과를 바로 '성경 전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시는 것이'라는 청교도 신학자 죤 오웬(J. Owen)의 논지를 확인하고 매우 기뻤다.


맺는 말

결국 모든 성령 체험이 말씀을 향하여 열린 눈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또한 풍부한 말씀을 가진 설교사역을 가능하게 하고 거룩하고 견고한 삶을 가져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부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내가 늘 좋아하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의 글과 언어는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체취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말과 글 속에서 숨긴다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 그 체취를 흉내내는 것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말씀 사역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성령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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