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가발공장은 교회가 되면서 켜켜이 쌓인 시간에 이야기를 담고 이웃을 품었다. 담을 쌓지 않은 교회 본관과 별관 사잇길은 주민들에게 골목길이 됐고, 성도들에게는 묵상의 공간이 됐다. 저녁 어스름 붉은 외벽돌이 조명을 받으면 골목길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교회 앞 작은 공원은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 됐다.
경기도 안양시 열린교회(김남준 목사)는 리사이클링을 넘어 업사이클링된 건축의 힘을 보여준다. 김남준 목사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면서도 그 공간에 들어가고 싶어야 한다”며 “집처럼 편한 곳이 아닌, 집보다 편한 곳이길 바랐다. 건축의 힘”이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쓰다
열린교회는 1993년 서울 서초구의 건물 지하 7평짜리 공간에서 시작했다. 5년 뒤 성도가 늘어 인근 빌딩에서 월세살이를 했지만 공간은 또다시 부족해졌다. 김 목사와 성도들은 넓은 공간을 찾아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찾은 곳이 평촌 공장지대였다. 2000년 930여평 공장 부지를 마련했지만 환경은 좋지 않았다. 공장이 사라지면서 방치됐고 떠난 사람들 자리는 쥐와 모기떼가 차지했다. 김 목사는 “형편없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교회 이전은 2002년 갑작스럽게 진행됐다. 건물 주인이 빌딩을 비워달라고 하면서 낡은 공장 건물을 보수해 들어가야 했다. 주어진 시간은 두 달이었다. 김 목사와 성도들은 건축가, 인부와 함께 예배 공간을 꾸몄다. 김 목사는 “전문가 조언을 들었다. 공간 배치를 위해 여기 계단을 1500번 정도 오르락내리락했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공간 구성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예배당이 그때는 본관 1층에 있었다. 2층은 긴 복도를 따라 늘어선 방들을 방향에 따라 용도를 분리했다. 한쪽 편엔 13개월 이하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자녀와 함께 예배할 수 있도록 12개 자모실, 2개 자부실을 마련했다. 맞은 편에는 소·대형 세미나실을 만들다. 3층 가건물은 사무 공간으로 사용했다.
별관엔 카페와 도서관을 만들었다. 2층 본관과 별관을 연결하는 다리도 그대로 살렸다. 2002년 5월 1일 첫 예배를 드렸다.
공장으로 지은 건물이라 취약점은 많았다. 예배당 한가운데 5개의 굵은 기둥이 줄지어 서 사각지대가 생겼고, 천장에 TV를 달았다. 당시엔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러다 2014년 가슴 아픈 사고가 발생했다. 누전에 의한 화재였다. 김 목사는 “최악으로 아팠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불가피하게 건축을 결심했다. 방 두 개만 태우고 진화돼 화재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건물 곳곳이 열을 머금었다. 대신 세월과 함께 쌓인 예배당의 이야기를 버리고 싶지 않아 리모델링을 선택했다.
교회는 성도들과 함께 세운 공간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한국교회 큰 목자였던 한경직 목사와의 일화다. 김 목사는 “영락교회 장로님이 운영하던 공장이라 60~70년대 당시 담임이신 한 목사님이 매주 목요일 이곳에서 직원들을 위해 예배하셨다”며 “부수고 짓는 게 편할 수 있지만 그러면 스토리는 사라진다”고 설명했다.
이야기를 담다
열린교회는 건물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당과 길이다. 담을 쌓지 않은 교회의 본관과 별관 사잇길은 주민들에게 골목길이 됐다. 이 길은 1층에 자리한 본관 예배당과 별관 카페의 접근을 용이하게 했다. 김 목사는 “이 길이 없으면 돌아가야 하니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길과 마당도 선교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건축은 건축가에게 맡겼다. 바로 임성필 집파트너스 대표다. 김 목사는 “교회는 ‘화장실을 늘려달라’ 등 필요한 것, 지켜야 할 원칙만 알려줬고 현장에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교회가 요청한 건 두 가지다. 기존에 배치한 공간은 흔들지 않았으면 했다. 이미 사용하면서 효율적인 배치인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공간이 갖는 시간과 이야기도 버리지 않았으면 했다.
임 대표도 그 요청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외벽의 붉은 벽돌과 박석길은 시간을 표현했다. 벽돌은 위아래로 교차해 쌓는 막힌줄눈 방식 대신 일자 형태의 통줄눈 방식을 택했다. 세련되고 간결해 보이는 데다 빗물이 빠지는 홈통을 건물 안으로 매립하는 데도 용이했다. 홈통은 붉은 벽돌과 어우르게 브론즈(동)를 사용했다.
본관 지붕은 3층으로 증축하면서 별관의 박공지붕 형태를 끌어왔다. 대신 본관과 별관의 지붕 외장은 메탈인 징크를 사용했다. 징크는 건물 중간에도 가로로 덧댔다. 임 대표는 “위로 뻗는 주변 건물과 달리 수평성을 강조하려고 했다. 수평 분절로 길어 보이는 효과도 낸다”고 설명했다.
본관과 별관의 내부 느낌은 다르다. 본당은 말 그대로 예배의 장소다. 3층의 612석 예배실 천장은 박공이라 따뜻한 느낌을 주면서 최대 6m 층고 덕에 답답함이 없다. 무엇보다 바닥에서 천장으로 뻗어나가는 좁고 긴 측창의 자연빛, 창을 따라 설치한 간접 조명은 줄지어 선 기둥(열주)처럼 경건함을 배가시킨다. 열두 제자를 의미해 열두개다. 벽면엔 라인 타공흡음 보드를 덧댔다. 임 대표는 “설교자의 목소리를 청중에게 명료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벽면이 두꺼워 보여 깊이를 준다”고 설명했다.
장의자 대신 개인 의자를 둔 건 김 목사의 아이디어다. 김 목사는 “장의자는 빈자리가 생기는데 개인 의자는 그런 게 없다. 이동이 자유롭고 의자 수를 빼고 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보조 예배실이 된 1층 예배당의 굵은 기둥은 보강재를 활용해 부피를 줄였다.
별관은 본관과 사뭇 다르다. 열린교회는 2002년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이곳에 카페와 도서관을 만들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지역 주민을 위한 배려였다. 세월이 흘러 지역은 재정비됐고 갈 곳은 늘었지만 여전히 주민들은 교회 카페를 찾는다. 일단 커피와 빵은 맛있고 저렴하다. 빵을 사러 서울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리모델링 후 찾는 사람은 더 늘었다.
김 목사는 “주중에 카페에 오면 손님들이 나에게 인사하지 않는다. 내가 담임목사라는 걸 모른다는 것이고 성도보다 외지인이 더 많다는 뜻”이라고 귀띔했다. 카페 입구 쪽 칼뱅파크는 또 다른 지역주민을 위한 공간이다.
별관 2층엔 세월이 담겨 있다. 천장은 60년대 공장을 받치던 목재 트러스가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트러스는 건물의 하중을 받치는 삼각형 골조를 말한다. 임 대표는 “천장을 거둬내니 목재 트러스가 나왔고 그 뒤로 박공 형태의 또 다른 천장이 나왔다”면서 “시간을 가져가기 위해 트러스엔 보강재를 대고 박공 천장엔 목재를 덧댔다”고 말했다.
퓨리턴도서관은 4700여권의 기독교 서적을 보유하고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열람이 가능하다.
안전도 강화했다. 별관과 본관을 연결하는 2층 다리는 양옆으로 하나씩 추가했다. 출구도 늘렸다. 그렇게 12개월간 공사해 2016년 1월 두 번째 입당 예배를 드렸다.
저녁이 되니 부벽등에 불이 들어왔다. 빛을 받은 붉은 벽돌과 칼뱅파크 나무는 낮과는 다른 분위기를 냈다.
교회는 공간의 개념을 교육관으로 쓰는 인근 열린빌딩과 세빛빌딩으로 확장한다. 본관 칼뱅파크와 함께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파크, 조나단 에드워즈 파크는 열린빌딩 7층과 4층에 자리했고, 존 오언 파크는 세빛빌딩에 있다. 교회사 최고의 영적 거인을 테마로 한 것이다.
퓨리턴도서관과 함께 열린빌딩엔 목회자 도서관과 어린이 도서관도 있다.
김 목사가 건축과 함께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다. ‘유지’다. 수시 점검은 물론이고 6개월마다 정기 점검도 한다. 골목길에 깐 박석길 중 일부는 평평한 대리석으로 교체했다. 휠체어와 유모차 이동이 어렵다는 민원을 수용한 결과다.
출처 : 국민일보(https://www.kmib.co.kr)